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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12 수료/Texts

PPT


1.

길찾기 때의 나만 봤던 사람이, 현재에 나를 보고는 ‘비약했다.’ 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지만, 정말 내가 비약을 했던가? 반짝하고 빛나, 지금의 내가 되었던가?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약진’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를 꿈꾸지 않고, 매일매일 고민하고 대답했다.

2.

영상을 하고 싶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 ‘영상을 하고 싶나?’라고 고민하던 내가 들어가 있었다. 머릿속에는 고민만 커갔지만, 대답하지 않았었다.

3.

이언희 감독을 만났다. 무엇을 하고 싶다면, 그것이 되기까지 생각하는 것보다 일단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말하기 위해 어떻게 말할까 를 생각만 했다, 처음 말해봤다.

4.

마주선 뒷모습, 에서는 짧은 머리, 남자 같은 모습, 행동, 체형 등으로 ‘틀린 여자’라며 남자 되어야지. 라고 생각 하면서, 보지 않았던 내 모습을 말해보았고,

5.

빨간약에서는 어른스럽고, 믿음직하고, 남을 잘 감싸줄 수 있는 맏딸이 아닌 나도 맏딸이고, 그래도 괜찮다고 이야기해봤다.

6.

빨간약 연출의도에서는 ‘빨간약처럼 영상이 나의 약이 되길 바란다.’고 썼었지만, 계속 ‘난 괜찮다.’를 가지고 이야기하기엔, 좀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

7.

성정체성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해보고 싶다. 하는 취지에서 시작한 이야기였다. 무려 3달에 걸쳐 기획하고 제작하였지만,

8.

상영하는 순간 검은방 이라는 제목의 방에 다시 숨어버렸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갑자기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어버리면서, 나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의 이야기가 아닌, 같이 보고자 하는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 경험이 어떻게 전달될지를 생각하며 내가 보고 싶지 않던 나의 모습을 마주하는 용기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 것인지, 관객보다 더 살펴보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9.

이곳에는 적을 수 없이 많았던 고민들이 있었고, 그 작고 세세한 질문들에게 계속해서 대답하며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어떤 날은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일까?’ 를 고민하고, 어떤 날은 ‘나는 누구인가’ 하며 고민했다. 고민한다는 것은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고민한다는 것은 중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고, 고민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수료식의 제목이 ‘앞길이 9만리’인 것은, 하자에서의 2년 혹은 2년 반이 걸어왔던 1만리고, 우리가 여기까지 오기 위한 ‘과정’의 한걸음 한걸음들이 있어 여기에 왔기 때문이다. 나의 과정은 다름이 아닌 ‘고민하는 것’ 이었다. 하나의 영상이 나오기 위해, 많은 시간 고민하고, 상영을 마치고도 영화에 대한 재 정의는 계속되고 있다. 그처럼 고민하고 대답하는 것에도 ‘절대적’인 것이 없다.

10.

그러니 고민하는 지금 열여덟 살이 그렇게 나를 괴롭게 하지 않는다. 미래도, 결정에 대한 확신도 그렇게 뚜렷하진 않지만 저 때 와는 다르다. 그 때의 내가 아무것도 없이 막연한 미래를 꿈꾸었다면, 지금의 나는 고민하고, 대답할 수 있는 힘을 손에 쥐고 한치 앞을 불안해 하지 않는다.

11.
여기에서 나는, 예전부터 지금, 지금부터 다음까지. 걷고 있었고, 그리고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