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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12 수료/Texts

2009년 봄학기 에세이 : 방 밖으로, 생각 밖으로, 문턱을 넘어서 나의 첫 공부를

 

-이번 학기 전체 회고

누군가는 이번 학기를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된 학기’ 라고 말한다. 지나온 3학기의 프로젝트도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이번 학기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프로젝트들은 특히나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 단순히 환경보호 프로젝트가 아니라 , 기후변화 시대의 환경에서 사는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게 한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 너무 가까워서 잘 보기 힘든 사랑, 가족, 죽음, 돈 에 대해서 당연하게 보지 말고 다른 생각을 해보자. 왜 그럴까? 라는 질문을 던진 애전별친 (愛錢別親), 그리고 이상한 낌새는 느껴지는데 막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때, 보다 말해보고 그 상황에 대해 생각하길 바랬던 ’페미니즘 공부모임‘까지.

이 프로젝트 안에 이런 내용과 생각들만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내가 참여하면서 프로젝트 각각에게 깊게 느낀 것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이 텍스트 (이 프로젝트를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면) 들을 어떻게 자기와 연결시키고 공부하고 있을 것인가 이었다. 한번 경험했다고 여기서 끊어져버리면 그것은 공부했다고 할 수 없다. 계속해서 지속해서 생각을 질문을 고민을 가져가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공부했다. 고 하지 않는다.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안 하고 안 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끈끈한 손으로 내 손에 들어올 것을 꽉 붙잡아야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피부가 될 때까지 손 안에서 녹여야한다. 그렇게 녹아 들어가면 그것은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할 것이다. I have to do. 그것이 어떤 공부이던 필요하다. 끈적하게 끈끈하게 끈질기게. 그게 어떤 종류의 공부더라도 내가 했던 시간들과 경험과 기억이 녹아들어갈 수 있게.

영화처럼 방에서 나오기

이번 방학에는 .정말. 아마도. 확실히. 밖에 나오는 시간이 적었었다. 나는 도서관과 내 방 앞을 돌아다니며 공부하고 운동하며 머리를 비우고 영화와 책을 보면서 내 머릿속에 소스를 채우고 싶었다. 다음 학기를 준비하기에 앞서 어느 때보다 꽉 찬 상태로 시작하고 기운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채로 학기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항상 1000%가 아니라 어떤 때는 20% 어떤 때는 80%씩 사용하고 싶었다.)

그러나 방에서 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도서관을 가기 위해서도 운동을 하기위해서도 방에서 나가야했는데, 만성이라고 변명하는 귀찮음에 나가지 않은 순간들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몸에 베어들고 아침밥을 먹는 것이 익숙해지더라도 그 시간에 어떤 것에 얼마나 집중하는지는 노력하지 않았다. 읽고 있으면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것 특히나 혼자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필요한데 그저 몸 가는 데로 시간 가는 데로 맡겨버리니 뭐가 될 리가 없었다.

다행히도 Pre-school이 시작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학습계약서도 써야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주니어 2학기 때 핑크하자를 경험하며, 성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여기(하자)에 있고 나와 같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정말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그리고 한 학기를 더 보내고 마지막 수료학기를 생각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시나리오까지 쓰진 않았지만, 나의 계획을 쓴다는 것이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영상방 안에서 커밍아웃 했지만, 이것이 영상으로 되었을 땐 영상방 자체상영이 아닌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커밍아웃하지 않은 채 만난 사람들에게도 상영되기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기(하자)에서 아웃될 것 같았다. 판돌들은 항상 젠더 감수성과 틀림이 아닌 다름을 말하지만, 모든 죽돌들이 자신에게 다가올 상황에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주저했던 것이 당연했을까? 나는 계약서에 처음부터 영화를 쓰지 않았다. 페미니즘 공부모임 이라고 소수라면 괜찮아! 라는 의도가 숨겨진, 성에 대해서 성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모임을 나의 수료프로젝트로 쓰고 있었다. 엄마에게 이 학습계약서를 보여드렸다. 엄마가 말하길, 하자가 아닌 공간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이것을 하고 싶다면 하자를 나가라. 나는 이런 것을 하기위한 너를 하자에 보내야할 이유가 없다. 라고 하셨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영화에 대한 계획을 썼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주로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은지가 들어간 정말 ‘계획서’ 인 학습계획서를 보여드렸다. 인쇄를 하려는 내 손이 떨렸다. 그러나 버튼을 눌렀다. 나는 엄마마저 밖이라고 생각하며 무서워하고 꺼려하고 말하지 못할 것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미 나에겐 밖이라는 것이 너무 큰데, 나에게 가장 큰 존재인 엄마마저 밖이 되면 난 정말 ‘방’에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나의 계획서를 보고는 엄마는 말했다. “너 이거 다 할 수 있어?” 라고.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단편영화, 페미니즘 공부모임 그리고 같이 공부하는 것이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가 써진 계획서였다. 이 프로젝트들을 머릿속에 그리게 될 때, 세계 지도 같은 큰 지도에 나라처럼 이곳저곳에 있었다. 다른 나라를 생각했을 때, 어차피 우리는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통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처럼 이 프로젝트들이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다 연결지점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니 많지 않아.’ 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학습계약서 1차를 엄마와 마치고, Pre-school 하는 기간이 왔다. 밖으로 가려는 데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상영하기 전이었지만, 내 존재가 나타나는 것 자체가 커밍아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 머릿속에서 어느 순간 아웃팅 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길을 떠나 나섰다. 왜냐하면 그 곳(하자)에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고, 밖 이었다 밖이 아니었던 곳으로 변한 곳은 이곳이 처음이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서 변화하고 싶었다.

글로비시

I HAVE TO DO

이것은 내가 글로비시를 하면서 알게 된 문법이다. 일명 TO 부정사라고 불리 우며 다양하게 쓰이는 to의 쓰임새중 하나를 가리킨다. 이번 학기 시작을 하기 위해 한글로 된 ‘나는 해야 돼’ 를 마음 속 으로 되뇌였다. should 처럼 가정하면서 은근히 협박하는 것이 아닌, 말하는 사람의 강한 의지가 담긴 have to 를 되뇌였다. 그러나 방학 때처럼 무엇을? 왜? 라는 것은 문장의 구조에 없었다. 그저 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는 말이었다.

주니어 3학기가 되고부터 하자를 오는 것이 설렘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뭔가 있을 거야. 하는 막연한 기대는 이곳에서 가지고 있지 않았다. 3학기+길찾기 란 시간은 무려 2년이다.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지루할지도 모른다.)것이 더 많은 시기다.

그러나 글로비시는 나에게 하자를 다시 보는 방법을 알려줬다. 가장 큰 예가 자기 소개하는 것이었는데, 자기소개는 단순하게 내가 어디학교에 무슨 일을 하는 누구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서밋을 준비하면서 나의 자기소개가 이렇게 바뀌었다.

준비 전) 나는 하자작업장 학교의 주니어 허브라고 한다. 나는 영상팀이다. 만나서 반갑다.

준비 중) 나는 주니어 허브다. 현재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데, 아직 구체적인 시나리오는 없다. 그러나 성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것이 나의 고민거리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페미니즘 공부모임이라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바뀌었는데, (물론 준비 중도 구체적은 아니지만) 자기를 소개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같이 나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가능성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글로비시는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것을 넘어 내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되었다. 지난 학기와 달리 이번에는 서밋 준비라는 큰 주제에서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자 라는 목적을 두고 참여하게 되었다.

목적으로만 봤을 때, 나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내가 하는 말도 그 사람이 이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방학처럼 나에게 부족한 것은 어떻게 이야기 할까 가 아니라, 어떤 것을 이야기 할까 였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I have to do. 그래, 나는 해야 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내가 어떤 것을 이야기할지 준비하는 것을.

애전별친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랑, 죽음, 돈, 가족 이라는 주제는. 나의 첫 영화는 가족과 관련된 영화였고 20대가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독립이 내 안에서 큰 단어가 되어가면서 돈을 고민하고 연애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나 애전별친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게 했다. 단순히 나의 경험으로 시작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다. 작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우리로부터 시작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전(錢)편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 돈도 가족도 집도 없는 자기의 몸을 덮을 옷만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를 주제로 글을 썼었다. 나는 돈이 생기면 라이터를 사고 또 생기면 담배를 사겠다고 그러고는 이웃의 정을 빌어 어떻게든 살아가겠다고 썼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들고 토론하게 되었을 때, 이런 삶이 가능할까 싶었다. 가장 그 상황에서 급한 것은 라이터도 담배도 아닌 약간이라도 좋으니 먹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사실 그것이 아니라면 죽을 것 같았다. 자살을 결심하지만 용기가 없어 죽지 못하는 끝에는 결국 삶을 선택하게 되는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다음엔 30대의 자기의 삶을 생각해보는 글을 썼다. 나는 전보다 현실적으로 추측되는 글을 썼는데 알바 시급이 좋은 일본에서 알바를 하는 프리타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내가 꿈꾸는 삶의 모습도 공부하고 있는 나도 없었다. 내가 꿈꾸는 것이 현실이 되기까지 얼마의 과정이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말 얼마나 돈을 모으고 어디에서 살아야 한다는 등 현실적인 고민이 필요했다.

현실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는지, 어떤 것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바라봐야한다. 그리고 미래의 나를 위해 지금의 나는 어떤 것부터 준비해야하는지 필요했다.

그러나 필요하다는 말만 하기엔 공부는 매우 깊고 길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겁내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이미지 탐구생활

“2009년의 18살의 이민아는 왜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영상 카메라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글쎄요.”

이미지 탐구생활에서 본 이미지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인상주의에 모네의 수련이었다. 인상주의는 빛을 기억하고 그 모습을 캔버스에 담는 것으로 기억된다. 그만큼 순간의 기억과 작가의 기억에 남은 인상을 보여줬다.

한동안 나의 바탕화면은 모네의 수련이었다. 그 그림을 보면서 나는 계속해서 질문했다. “당신은 왜 캔버스에 붓을 칠했나요?” 그리고 카쉬전을 보고 온 후 카쉬에게도 질문했다. “당신은 왜 인물 사진을 찍었나요?" 하고.

그들은 내게 답했다. 이것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가장 좋았고,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찍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할까……. 근데 너는 왜 카메라를 들었는데? 라는 말을 하고 질문을 했다.

단순하게 궁금했기 때문에 나에게 질문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처음 주니어가 되어 매체를 선택하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가 왜 카메라를 들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1학기, 2학기에서 지금까지 나의 대답은 반년은 부족하고, 1년을 알아도 모르겠고, 1년 반이 되어서 나를 돌아보게 해주는 어떤 것보다 투명한 거울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버전의 대답이 필요했다. 이것은 수료를 하고 난 휘 나의 진학과도 관련된 문제였고 공부를 하게 될 때 주로 보게 될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처음 내가 어떤 매체를 잡았어도 이 질문은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확신도 없고 그저 하고 싶었기 때문에 힙합을 선택했다가 해본 것을 더 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에 영상을 선택했었다. 지금 다시 나에게 선택에 순간이 오면 이것을 선택할까? 하는 고민을 해본다.

아직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버전 1.0이 되기 전 0.6으로 대답해본다.

지금 내가 카메라를 잡은 것? 다른 것보다 내 이야기를 표현할 때 더 전달이 잘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STUDIO

지금에서야 입을 떼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행복하기를 꿈꾸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그렇지만 내가 계획서에 쓴 것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이야기였다. 같은 주제의 이야기였지만, 바라보는 입장이 달랐다. 내가 처음 그리려고 했던 것은 방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이야기였고, 처음 시나리오에 나온 이야기는 이미 방을 나온 상태에서 사람을 만나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나름의 생각으로 캐스팅과 장소와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엎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행형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영화 안에서의 완결도 고민도 조금은 과거의 것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나와 특정한 소수에게는 반가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아직 더 큰 다수에게는 당황스러운 얘기였기 때문이다. 어떤 맥락도 흐름도 없어보였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힘들어서 피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두에게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영화의 이름은 ‘검은 방’ 이 되었다. 모든 색이 다 섞여있는 검은색과 떠나기엔 너무 안락하고 편안한 방. 그리고 그곳을 나가는 주인공의 이야기. 더 크게 봤을 땐 나는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밖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편안한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밖이 아니라 또 다른 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방에 있기엔 너무 커버린 내가 그 안에서 웅얼거리며 있을 것인가, 더 큰 곳에서 작게 중얼거릴 것인가 를 선택해야했다.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 나는 지금의 나의 입장을 정리하는 글을 썼다. 모두에게로 나가기엔 두렵고 여기에서 나가기엔 조금 무섭다. 그렇지만 나오고 싶고 나오려고 한다. 조금 더 생각해보라는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적은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식인에서 명쾌하게 대답해주는 것처럼 우리의 고민에도 제발 고민을 유예시키라고 하지 말고 대답해주길 바란다 하고.

그리고 시나리오를 쓸 수 있었다.

편집을 다 마친 지금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나의 이야기로만 풀기에는 원하는 정보의 양도 깊이가 많이 깊다. 내가 경험한 세계가 이 세계의 모든 경험을 말해주진 않는다. 그냥 한 개인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개인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가 되려고 할 때 더 깊은 결을 요구한다. 정확하게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막연하게 나 하나를 통해 모두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 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을 담고 싶다면 나는 공부를 해야 함 이 틀림이 없다.

페미니즘 공부모임

판돌도 팀장도 없었던 모임이다. 죽돌들이 자체적으로 모였고 특히 나와 밤비가 모여 반장 같은 역할을 했었다.

우리에겐 각각의 키워즈가 있었다. 젠더, 정체성, 차별, 폭력 .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하나의 주제가 아닌 조금 더 넓은 세상이 말하는 억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다.

우리는 너무 익숙하게 보고 생각했던 것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자 했다.

우리는 우리를 답답하게 했던 것들에 대해 제대로 보고 그것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목적이 없었다.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공부 모임’ 을 시작하려 할 땐 무엇이 필요할까?

1.주제

1-1. 텍스트

2.사람

3.경험담(을 말할 수 있는 신뢰)

4.존중

공부모임은 4월부터 시작해 6월까지 매주 화요일 7시에 모이는 off the record 모임이었다. 총 7명으로 구성되었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몇몇은 말할 준비도 된) 탄탄한 구성원으로 시작했었다.

처음 타리의 워크숍을 통해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의식하게 되고 우리는 ‘으쌰!’하고 일어섰다. 각자의 질문 점들을 나누고 어떤 이야기를 할까 즐겁게 고민하기도 했다. 우리가 함께인 것은 (나의 의도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같이 공부하면서 서로가 놓치게 되는 부분을 이야기하고 꼼꼼한 공부가 되길 바랬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은 것은 이야기할 거리가 많아서 좋다. 그러나 공동의 목적을 세우기 위할 때 더 힘든 것이 있었다.

처음 생각하게 되었다. 같이 공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같이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준비한 것이 있고 난 뒤 이야기를 하면서 공부한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리뷰하는 자리에서 이런 단어가 나왔다.

같이 ‘수다’ 떠는 것은 즐거운데 깊은 토론이 필요한 것 같아요.

좋은 말이었다. 우리가 더 모임을 이어가기 위해선 깊은 토론이 필요했고, 깊은 토론을 하기엔 공부하는 것이, 공부하는 것을 위해는 우리의 목적이 필요했다. 혼자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공부하는 것은 목적이 필요하다.

같이 나누고 싶은 것 얘기하고 싶은 것은 부가적인 것이고 , 자신의 경험을 텍스트로 가지고 자기 자신이 변하게 된다면 그건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알고 변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 보이고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 세계를 뒤흔든 8명의 독일인

마지막 시간, 우리의 과제는 8명의 인물 중 한 명과 그에 관한 키워드를 골라 연구를 해 소논문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카프카를 보기로 했다. 그리고 카프카 중에서도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했다.

앞서 말했듯 내 영화는 ‘방’과 관련된 영화다. 그 생각에 너무 집중했는지, 카프카 강의를 들으면서 강압적인 아버지와 뒤에서 도와주는 어머니, 그리고 예민한 카프카를 힘들게 했던 ‘밖’ 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던 밖에 대해 글을 쓰던 그의 방이 궁금했었다.

변신을 읽으면서 내 생각을 뒷받침해줄 몇 가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벌레로 변하고 난 후 방으로 나왔을 때 아버지가 그를 위협하며 ‘슷슷’ 거리던 소리와 소중한 오빠가 ‘죽여도 될 것’ 이라고 말하는 동생과 자신의 시체를 버린 후 너무도 뿌듯해 하는 가정부. 그리고 그가 죽자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그의 가족들. 그는 집에서 자신의 생각 안에서만 존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것을 발표하고 난 후, 티멘(강사님)에게 코멘트를 들었다. 그의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해방되는 것이었다고.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보면, 카프카의 아버지가 카프카와 카프카의 유대인 친구들을 가리키며 ‘독충’ 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고 하셨다. 그리고 거기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렇다고. 더 자세한 코멘트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순간 하나를 공부한다고 하나만 보지 않았나 싶었다.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오직 그 부분에만 집중하고 보는 것이다.

문득 목적 없이 공부하는 것이 혼자 공부하는 것에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엄청난 동기부여나 목적에서가 아니라, 어떤 부분이 궁금해서 이것을 조금 더 알아보고 싶어 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것. 카프카를 공부하기로 한 것도 다른 것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시작해본 것이었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고민한 ‘공부는 어떻게 하는거야!’ 라는 질문에 대답해주기엔 충분했다. 관심사를 찾고 하나라도 보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를 비교해서 보고 혼자 질문하고 더 찾아본다. 그리고 잠시 생각할 시간을 두자.

그러다 보면 보일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 (가정) 이 있을 때 다른 텍스트들과 연결할 수 있는 것들이. 부분을 집중해도 계속 집중하다보면 벽을 만나게 될 것 같다. 그럼 그 벽에서 길을 돌아가던 돌파하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것은 가정법이다. 이렇게 될 수 있을지 아닌지 알 수 없다. But I have to do,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적는다.

나에게 맞는 공부의 시작방법을 알게 되었다. 거대한 목적을 생각하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궁금한 것, 내가 정말 더 알고 싶은 것에서부터 막연하지만 시작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진행해 나가는 것은 일단 ‘끝 까 지’ 해보는 것이다. 어딜 가야 할 지 막막한 벽을 만날지라도,

시작은 페미니즘부터. 내 처음의 고민거리였던 성정체성부터 시작할 것이다. 지금의 나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 같다. 언제까지 이것과 함께할지 알 수 없다. 하자를 수료한다는 것은, 나를 괴롭히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 도망치지 말고, 마주할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내 주변 사람들에게 말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마다 공부를 하는 방법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작한다.

새로운 것을 찾아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내 손에 걸려온, 사실 아직도 내 손에서 걸려있는 것들 (다만 엉켜서 무슨 색이었는지 잘 안 보이는 실을) 을 풀어보고 골라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한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지금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