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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12 수료/Essay

에세이 1-7


-만남

하자에서 배운 것 중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은 빼놓을 수가 없다. 107호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각자를 소개하며 내가 어떤 능력을 가졌다. 고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다. 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보다는 방학 중 프로젝트 [인터넷 방송국]을 시작으로 작업으로 알아가게 되었다.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은지. 등등. 모두 다양한 사람들이었으나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적당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회의에서도, 저녁식사(정말 주기적이었다)와 토론, 영화이야기, 어떤 것에 관심있는지에 대한 농도깊은 '왜?'라는 질문까지, 어느 하나 적당히 하지않고 진심을 다해 물어보고 대답했었다. 대학생들이 많아서였는지, 평균나이대가 길찾기 때보다 확 높아서였는지. 그 사람들이 너무 높아보이고, 이것이 사회라고, 정말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전부를 바쳐야겠거니 싶었다. 적당히 회의에 참여, 작업하기, 관계맺기 했었던 것이 아니라. 생활의 전부를, 만남의 전부를 혹은 인생의 전부를 여기에 쏟아부어야했다. 그래야만이, 절박하고 절실하게 이곳에 있을 것이고, 나의 미래에 이 사람들과, 영상과, 지금 생각들이 이어질테니깐. 그렇게 팀에, 관계에, 하자에, 사람에 매달리던 2년반이 지났다. 여기에서 지난 14년보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많은 사람을 만나봤다. 그렇지만, 2년 반은 2년 반이다.

1. 1학기

처음 주니어 1학기가 되고, 처음 Catch scope 라는 팀이 생기고,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Focus on interview project'였다. 관심있는 직업인들을 선정하고, 팀을 나눠 인터뷰하는 프로젝트였는데 나는 케이와 토토와 함께 이언희 감독의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른 팀이 인터뷰하는 것을 보며 "추가 질문도 준비해야지", "중심단어는 적어야지" 같은 tip을 얻어가고 인터뷰를 하게 되었지만. 정작 그날에는 떨리는 마음에 인터뷰질문 이상의 질문을 하지 못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언희 감독님에게 후광이 비췄다." 라고 말했고 그 후광을 본 사람은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현장에서의 지휘자가 되는 감독, 자기에게 갇혀있기 보다는 소통이 되어라 하는 의미에 화살표를 남기고 간 이언희 감독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렇게 가볼까 저렇게 가볼까 하지 않고, 열심히 하다보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감독이 되었고 영화를 찍었다. 내가 만나보지 못한 김점선 씨는 매일 매일 그림을 그리셨다. 해야지 라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생활이고 일상이고 습관이었다. 나는 그 누구를 만나든 사람들에게 후광을 발견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만나려던 사람들 중 하나도 자신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었고, 각자의 길과 경로에서 그것을 삶에 녹여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깐 말이다.

인터뷰 영상을 편집하며, 길찾기 평가 테이블 이후 내 머릿속에 있던 질문에게 답하게 되었다. 질문은 "영상을 계속 할꺼야?" 였고 내 대답은 "응" 이었다. 이언희 감독님을 보고, 이왕 잡은 카메라 알 때까지 잡아보자 싶었기 때문이다.

2. 마주선 뒷모습

그리고 처음으로 카메라를 잡고 이야기한 것은 지난 4년간의 이야기가 담긴 [마주선 뒷모습]이라는 슬램비디오였다. 짧은 머리와 여성스럽지 않은 옷 스타일과 말투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궁금증이었고, 매일같이 들려오는 질문에 여자이기를 포기하고,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었다. 그렇게 가슴을 붕대로 묶고 머리를 더 짧게 짜르고, 여성스럽다는 눈을 안경으로 가리면 남자가 될 줄 알았지만, 정작 그렇게하니 '여자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피할 수 없지만, 묻어두고 싶었던 그 4년 이야기를 짧은 영상안에 담아보았다.

남과 연결할 수 있는 영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내가 카메라를 들고 이야기를 해본 첫 영상이었다. 관객들은 박수를 치고, 세이랜은 잘했다며 등을 쳐주었다. 이곳은 여성과 남성, 그것을 겉모습으로 나누지도, 성에 관한 역할을 정하지도 않는 동네라고 생각했다. 영상은 내가 묻어두고 싶었던 그 뒷모습과 마주한다고, 뒷모습도 나였고 묻어두지 않은 채 걸어가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혼자 웅얼거림이 길어지던 때, 방학 중 프로젝트로 Pink haja 라는 것이 진행되었다. Pink haja를 떠올려보면 계절이 여름이다. 분명 겨울에 진행된 프로젝트였고, 뜨거운 열기에 에어컨을 켜둔 기억은 없는데, 몸은 어쩔 줄 몰랐고 방은 더웠고 이야기는 Hot했다. 나처럼 성정체성에 관해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고, 연애관계에서 남/여의 위치와, 부모님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까 머릿속에서 생각하다가, 실제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을 보게 되니 '성'에 관해 고민하던 사람이 나 혼자구나 라는 것을 알았다. 항상 107호안에서 익숙한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하다, 낯설은 사람들 앞에서 처음 이야기 해봤다. 겁낼만큼, 격한 반응도 화난 사람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없었다. "너는 그런 경험을 가졌구나" 라는 이야기와 분위기가 있었다.

두려움 속에 마무리했던 쇼하자는 끝났고, 이제 새 학기를 맞이하는 문이 열렸다. 나는 기대하게 되었다. 이정도의 관심, 감정, 지식이 있다면 나중에 우리가 함께 모여 다시 이야기를 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고민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고, 고민을 경험과 이야기로 풀어내는데 Pink haja가 디딤돌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 순간에 하자의 모든 사람이 '성'에 관해 열린 눈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아니, 성에 관해서 라기보다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에 관해 열려있다고 했던 것 같다. pink haja가 끝나고도, 여전히 나를 남자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동성애자라며 안 좋은 시선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는 커밍아웃 끝에 관계가 단절되는 상황도 있었다. 2008년 9월, summit을 준비하면서 하자의 이곳저곳에서는 영어가 많이 보였다. 그리고 하자의 7가지 약속 중 성차별이, sex의 차별이 아닌 gender의 차별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 주니어 4학기를 계획하면서 '페미니즘 공부모임' 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었다. 죽돌들의 참여가 우선이고, '여성의 힘이 강하다.', '여성주의에요~', 라는 말이 판돌들이 알려줘서가 아니라, 죽돌들 스스로 배우고 알게 되면서 말하길 바랬고, 제일 중요했던 건 '성'에 관한 것에 대한 '무지'를 보면서 더 이상 나 혼자 화내고 열내고 성내면서 속썩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이고, 모임은 시작했다. 나는 반장이었고, 공부할 텍스트를 찾고, 주제를 잡거나 잡힌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찾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성'에 관한 이야기에 관해서,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적었다. 예를 들면, 명절이 되면 왜 엄마들은 주방에, 아빠들은 티비앞에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을 가지고 토론했었다.

물론 어떤 프로젝트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잘 진행되지는 않았다. 자기 경험과 연결되지 않은 지식들을 주로 얘기하기 쉬웠고, 그 지식들은 우리가 이정도 알고 있다. 라며 서로의 깊이를 알 수 있었지만, 주변에서 들었던 것으로 끝나 짧은 깊이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내가 기획한 모임이라, 진행이 잘 되지 않을 때마다 괴로움과 죄책감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저것을 말하면서도, 나도 '공부'하고 있지 않았고 어느 순간 책을 보지 않았었다. 물론 책을 보면서도 작가의 글을 '이것이 진리, 따라야할 의무, 이것만이 해답'이라며 보는 것은 공부라기 보다, 자칫 허울좋은 말이 될 수가 있다.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고 녹여내서, 작가가 말했던 것중 인상깊은 것을 녹여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공부고, 자기자신을 텍스트로 읽을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페미니즘'이라면,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고, 도대체 여성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남성, 여성 모두를 위한 것인지, 의무가 선택인지 될 수 있는 건지 등등 이야기가 많다면, 더 그렇게 공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3. 매체(? 말이 너무 큼)

주니어 1학기, 카메라를 쥐어보겠다고 생각한 뒤로 계속해서 한 고민은 "내가 왜 카메라를 들고있지?"였다. 주니어 2학기, 주말영상학교를 하며 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고, 하자작업장학교 Promotion video 걸어서 바다까지 촬영을 하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보고, 주니어 3학기, Pre-summit기록팀이 공식적인 일을 기록하고, 편집하고 Save my city라는 공동작업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작 상영하는 순간이 됐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다시 묻어버리려고 했던 '검은 방'을 제작하였고, 영상을 통해 일본에 있는 도쿄슈레대학에 방문하고, Save my city 프로젝트로 제작한 '황금도시'가 TBS 시민영상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게 되었다.

영상을 통해 배운 것은 많았고, 카메라를 들고 이야기 듣는 것은 즐거웠다. 편집 과정에 내가 쏟는 집중과 컷 사이가 마음대로 움직였을 때의 즐거움은 어느때보다 강했었다. 그러나 학기를 거듭하며, 수료에 관한 질문이 나오고, 그 후에는 뭘 할꺼냐라는 질문에 '영상은 하지 않겠어' 라고 대답을 했었다.

지난 2008년 8월, 캐치스코프는 도쿄슈레대학에서 진행된 도쿄슈레국제영상축제에 하자의 영상팀이었던, Visual rave가 제작한 'KTX : 300km 가 들려준 침묵과 함성'과 '고스트 걸즈'가 초청되어, G.V를 하러 가게 되었다. 그리고 4박 5일간 일본에서 머물며 도쿄슈레대학에 재학중이던 '메구미'에게 "카메라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 질문에 "가장 나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거울" 이라고 대답을 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나의 대답이 내 머릿속에서 오래 있었다.

'거울' 로만 으로 카메라를 들기엔, 카메라는 무겁고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 겨울, Save my city project로 제작한 '황금도시'가 상을 받고,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 상을 수상실적으로 인정해주는 학교들이 있었고, 마치 아무이상없다면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생겼다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희망이 사실은 불안했다. 과연 이것이 내가 하고싶은 것인지 라는 고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니어 4학기 수료에세이에서도 확실하지 않았고, 8월이 들어서도 확실하지 않았다. 2년 반 동안 손에 익었던 것을 놓아버리기엔 사라질 것 같아 무서웠고, 다른 선택의 폭이 뭐가 있을까 도저히 보이지 않았었다. 다가오는 시간들을 거부하고 싶었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선택해야하는 순간들이 온다. 내가 어떤 것을 바라고 원하는지 말해야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순간이. 유란이가 나에게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뭐야?" 라고 물었다. 나는 우물거리다가 "여성학"이라고 대답했다.

주니어 2학기에,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이라는 프로젝트를 수강했는데, 거기에선 처음들어본 철학, 미술, 기호학, 과학 등을 강의해주셨고, 제일 기억남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루했던 것 혹은 어려웠던 것을 다르게 바라보고, 내가 관심있던 역사와 연결지어보는 시도를 해본 것이다. 그리고 주니어 4학기, 또 한번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 세계를 뒤흔든 8명의 독일인 프로젝트를 수강했다. 프로젝트의 마지막, 세계를 뒤흔들었다던 독일인들과 관련된 주제 중 하나를 선택해 논문을 쓰는 것을 했었다. 완성되거나, 고 퀄리티의 논문을 쓰진 않았지만, 관심있는 것을 책과 나의 생각으로 연결해 이야기해보는 것을 했다.

영상이 내 안에 사라질까봐 두려워했었던 것도, 폭이 없어보이던 것도 내가 너무 급하게 생각해서는 아닐까 싶다. 당장이라도 며칠안에 사생결단을 내거나, 한번의 선택으로 그 다음의 기회가 결정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2년반 그리고 18년동안 알게된 것은 내가 앞서말한 상황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뿐더러, 자주 찾아오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앞서 여기에 전부를 쏟아부으려고 했다고 했다. 그렇게 전부를 쏟아부을수는 있었지만, 이곳이 나의 전부가 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자면, 집이 있었고 간간히 하던 연애가 있었고, 만나던 친구들이 있었다. 이처럼 내가 하려는 공부는 그것 하나만 있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될수도 없을 것이다. 분명 하자작업장학교에 입학한 것은 18년 중 '대단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이제야 18년을 살았고, 내 앞에는 18년의 몇 곱절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하자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인생역전'하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서 여러가지를 배웠을 뿐이다.

Epilogue

나에겐 11살짜리 동생 수진이가 있다. 수진이는 가끔 자기는 서울대를 들어가지 않으면 유학이나 가겠다고 이야기하고, 내가 거기서 뭐하게? 라고 질문하자 "글쎄.."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물어본다. 언니는 대학 어디갈꺼야? 가서 뭐할꺼야? , 나는 "여성학" 이라고 대답을 했는데 수진이가 그 후에 뭐할꺼냐고 유명하지도 않고 라고 툴툴거린다.

수진이가 나보다 더 현실적일지 모른다. 대학 졸업후엔, 당연히 취직이고 어떤 곳을 가야 좋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좋은 것인지 나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것이 꿈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하다보면 되겠지 하는 종류의 꿈 말이다.

어느새 가슴을 보이기 싫어 온통 움츠렸던 나는, 어깨를 피고 앞을 보고 걷게 되었고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이 많아졌다. 멋있는 사람을 찾아, 그 사람처럼 되고 싶었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변화하기 위해선 변화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만화책 처럼 '한 달 후, 6개월 후, 1년 뒤' 와 같은 말로 나의 시간은 축약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있었기 때문에 한 달이 생겼다. 그리고 그 한달이 쌓여서 한 학기가 지나고 수료를 하기 까지 지난 4학기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마주하고,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정도(正道)를 걸으려 가야 한다. 항상 옳고 그른 것, 좋은 것 나쁜 것이라는 생각 이상의 것을 가지러 간다. 고대 페르시아 시인 루미가 말한 "틀린 행동과 옳은 행동이라는 생각을 뛰어 넘는 것이 있다. 거기서 만나자' 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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