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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12 수료/Essay

에세이 1-8


1. 1학기

처음 주니어 1학기가 되고, 처음 캐치스코프 라는 팀이 생기고,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Focus on interview project'였다. 관심있는 직업인들을 선정하고, 팀을 나눠 인터뷰하는 프로젝트였는데 나는 케이와 토토와 함께 이언희 감독의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팀의 인터뷰는 다른 팀보다 늦어, 다른 팀이 인터뷰하는 것을 보며 "추가 질문도 준비해야지", "중심단어는 적어야지" 같은 tip을 얻어가고 인터뷰를 하게 되었지만. 정작 그날에는 떨리는 마음에 인터뷰질문 이상의 질문을 하지 못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언희 감독님에게 후광이 비췄다." 라고 말했고 그 후광을 본 사람은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현장에서의 지휘자가 되는 감독, 자기에게 갇혀있기 보다는 소통이 되어라 하는 의미에 화살표를 남기고 간 이언희 감독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렇게 가볼까 저렇게 가볼까 하지 않고, 열심히 하다보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감독이 되었고 영화를 찍었다. 내가 만나보지 못한 김점선 씨는 매일 매일 그림을 그리셨다. 해야지 라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생활이고 일상이고 습관이었다. 나는 그 누구를 만나든 사람들에게 후광을 발견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만나려던 사람들 중 하나도 자신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었고, 각자의 길과 경로에서 그것을 삶에 녹여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깐 말이다.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전부를 바쳐야겠거니 싶었다. 길찾기 때부터 해온 적당히 회의에 참여, 작업하기, 관계맺기 했었던 것이 아니라. 생활의 전부를, 만남의 전부를 혹은 인생의 전부를 여기에 쏟아부어야했다. 그래야만이, 절박하고 절실하게 이곳에 있을 것이고, 나의 미래에 이 사람들과, 영상과, 지금 생각들이 이어질테니깐.

인터뷰 영상을 편집하며, 길찾기 평가 테이블 이후 내 머릿속에 있던 질문에게 답하게 되었다. 질문은 "영상을 계속 할꺼야?" 였고 내 대답은 "응" 이었다. 이언희 감독님을 보고, 이왕 잡은 카메라 알 때까지 잡아보자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해 팀에, 관계에, 하자에, 사람에 매달리던 2년반이 지났다. 여기에서 지난 14년보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많은 사람을 만나봤다. 그렇지만, 2년 반은 2년 반일뿐 14년보단 길지 않다.

2. 마주선 뒷모습

처음으로 카메라를 잡고 이야기한 것은 지난 4년간의 이야기가 담긴 [마주선 뒷모습]이라는 슬램비디오였다. 짧은 머리와 여성스럽지 않은 옷 스타일과 말투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궁금증이었고, 매일같이 들려오는 질문에 여자이기를 포기하고,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었다. 그렇게 가슴을 붕대로 묶고 머리를 더 짧게 짜르고, 여성스럽다는 눈을 안경으로 가리면 남자가 될 줄 알았지만, 정작 그렇게하니 '여자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피할 수 없지만, 묻어두고 싶었던 그 4년 이야기를 짧은 영상안에 담아보았다.

남과 연결할 수 있는 영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내가 카메라를 들고 이야기를 해본 첫 영상이었다. 관객들은 박수를 치고, 세이랜은 잘했다며 등을 쳐주었다. 이곳은 여성과 남성, 그것을 겉모습으로 나누지도, 성에 관한 역할을 정하지도 않는 동네라고 생각했다. 영상은 내가 묻어두고 싶었던 그 뒷모습과 마주한다고, 뒷모습도 나였고 묻어두지 않은 채 걸어가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혼자 웅얼거림이 길어지던 때, 방학 중 프로젝트로 Pink haja 라는 것이 진행되었다. Pink haja를 떠올려보면 계절이 여름이다. 분명 겨울에 진행된 프로젝트였고, 뜨거운 열기에 에어컨을 켜둔 기억은 없는데, 몸은 어쩔 줄 몰랐고 방은 더웠고 이야기는 Hot했다. 나처럼 성정체성에 관해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고, 연애관계에서 남/여의 위치와, 부모님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까 머릿속에서 생각하다가, 실제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을 보게 되니 '성'에 관해 고민하던 사람이 나 혼자구나 라는 것을 알았다. 항상 107호안에서 익숙한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하다, 낯설은 사람들 앞에서 처음 이야기 해봤다. 겁낼만큼, 격한 반응도 화난 사람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없었다. "너는 그런 경험을 가졌구나" 라는 이야기와 분위기가 있었다.

두려움 속에 마무리했던 쇼하자는 끝났고, 이제 새 학기를 맞이하는 문이 열렸다. 나는 기대하게 되었다. 이정도의 관심, 감정, 지식이 있다면 나중에 우리가 함께 모여 다시 이야기를 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고민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고, 고민을 경험과 이야기로 풀어내는데 Pink haja가 디딤돌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 순간에 하자의 모든 사람이 '성'에 관해 열린 눈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아니, 성에 관해서 라기보다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에 관해 열려있다고 했던 것 같다. pink haja가 끝나고도, 여전히 나를 남자대하듯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동성애자라며 안 좋은 시선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는 커밍아웃 끝에 관계가 단절되는 상황도 있었다.

3. 어깨동무 (하나만 필요하진 않다구요)

아무리 한번,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Pink haja가 끝나고, 주니어 2학기가 되었을 때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수강신청을 했다. 수업은 소규모로 이뤄진다고 하였고, 여기서 다뤄지는 것들은 들어만 해보지는 못한, 여성학, 미술, 철학, 과학, 기호학 등등이 있었고, 꽤나 많은 지식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야기할 때는, 항상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기서 얻은 '많은 지식'으로 채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정작 지금은 잘 이야기할 수 없지만, 강의가 끝나고, 아는 것이 많아지고 단어도 상식도 많아지만 그 떈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강의가 시작한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하나 익숙한 것 없었을 정도로, 쉬운 것도 익숙한 것도 아니었지만, 막연하게 '어렵다'라고 받아들이기 이전에 알고 싶다 라는 생각으로 기억하고 이야기하게 되면서 처음 기대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쌓이진 않았지만 조금씩 쌓여가지 않았나 싶다.

강의에선 철학과 니체란 주제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면서 니체가 말하는 '낙타'를 알게 되고 크게 낙타에 공감한 나는, 사람들 앞에서 떨리지만 이야기하는 것을 해보았다. 미학을 하면서, 액자 속에 갇혀있는 고고하고 좀 있어보이는 유화와 같은 것 만이 미술이 아니라, 내가 해석하는 것. 현대 미술을 보며 어떤 것을 '예술' 이냐고 정의내리는 것은 나 스스로가 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고, 기호학을 하면서 우리가 말하는 것에, 생각하는 것에 숨어져 있는 이야기들을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영상으로 나의 이야기를 풀어본 [마주선 뒷모습] 이후, 처음 사람들 앞에서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가 되는 것을 경험해보았고, 나는 같이 참여하고 있었던 주말영상학교에서 [빨간약]이라는 영화를 만들면서, 내가 생각하는 가족에 대해, 맏딸에 이야기를 조금은 덤덤하게 그려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3. 그렇다면, 내가 하고싶은 건

2008년 9월, summit을 준비하면서 하자의 이곳저곳에서는 영어가 많이 보였다. 그리고 하자의 7가지 약속 중 성차별이, sex의 차별이 아닌 gender의 차별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 주니어 4학기를 계획하면서 '페미니즘 공부모임' 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었다. 죽돌들의 참여가 우선이고, '여성의 힘이 강하다.', '여성주의에요~', 라는 말이 판돌들이 알려줘서가 아니라, 죽돌들 스스로 배우고 알게 되면서 말하길 바랬고, 제일 중요했던 건 '성'에 관한 것에 대한 '무지'를 보면서 더 이상 나 혼자 화내고 열내고 성내면서 속썩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이고, 모임은 시작했다. 나는 반장이었고, 공부할 텍스트를 찾고, 주제를 잡거나 잡힌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찾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성'에 관한 이야기에 관해서,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적었다. 예를 들면, 명절이 되면 왜 엄마들은 주방에, 아빠들은 티비앞에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을 가지고 토론했었다.

물론 어떤 프로젝트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잘 진행되지는 않았다. 자기 경험과 연결되지 않은 지식들을 주로 얘기하기 쉬웠고, 그 지식들은 우리가 이정도 알고 있다. 라며 서로의 깊이를 알 수 있었지만, 주변에서 들었던 것으로 끝나 짧은 깊이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자기 경험과 연결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자기와 먼~ 얘기를 하면서 지식은 쌓여가겠지만 '성찰'은 없는 것이고, 결국 바른말만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는 우려가 있었다. 내가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에서 배운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의 삶을 텍스트화 시켜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나의 주변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나 부터 변화하고 반응하고, 좀 더 넓은 세계를 보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공부'였다.

내가 기획한 모임이라, 진행이 잘 되지 않을 때마다 괴로움과 죄책감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저것을 말하면서도, 나도 '공부'하고 있지 않았고 어느 순간 책을 보지 않았었다. (물론 책을 보면서도 작가의 글을 '이것이 진리, 따라야할 의무, 이것만이 해답'이라며 보는 것은 공부라기 보다, 자칫 허울좋은 말이 될 수가 있다.)

같은 학기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 세계를 뒤흔든 8명의 독일인] 이라는 프로젝트를 참여하던 중 받았던 과제가 생각난다. 모든 강의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지난 8명을 돌아보며, 기억에 남은 키워드를 뽑고 그에 관한 짧은 소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가장 하고 싶은 키워드를 고르고 관련 자료를 읽고, 찾고, 정리하면서 책에서 말하는 것을 긁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이야기와 생각을 근거 있게 만들어보는 것을 경험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 것' 이라는, 동기화와 즐거운 시작이었고 진리처럼 여러 이야기를 녹여놓은 것에 감동하고, 그것에 대한 내 해석을 붙여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공부모임에 있는 사람도, 나도 배우고 공부했으면 한다. 물론 자기의 경험을 한바탕 말해보는 경험이 없는 이상, 말해보는 것이 필요하고. 몇 시간동안 입으로 '다시 쓰는 자서전'을 해봤던 나는, 이제 그 경험을 '텍스트'로 만들어서, 내가 보이는 사회와 연결지어보고, 궁금한 것에 대한 것들에 대답을 내 경험과 사회와 연결지어보고 있다.

대학에서 '여성학'을 배운다면, 나는 어떤 것을 배우게 될까? 세이랜은 지레 겁주시며, 지금 하는 것처럼 배우진 않을지도, 배운 이야기보다 더 적은 이야기를 할지도, 꽤 보수적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아직 대학을 경험해보지 않았고, 한국사회의 이야기들을 읽고 해석해본다는 커리큘럼에 "여기에선 어떻게 보고, 어떻게 해석할까?" 라는 기대가 있다. 공부를 생각하면, 페미니즘을 빼놓을 수가 없다. 혼자 하는 것이 공부라는데, 혼자 시작해본 것이 '페미니즘' 이었다.

'방의 공기를 읽는다.'(유란 에세이 중) 라고 불리는 것처럼, 나는 사람들의 감정과 상태에 예민하고, 그런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고 있다. 그것과 연결되는 것인지, 그만큼 다른 것에도 예민한 것 같다. 그래서 기사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볼 때, 남녀의 관계나 의무 같은 것이 느껴지면, 그때까지 보던 것과는 다르게 읽히고, 저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뭘까 하는 질문과, 그 관계나 의무를 표현하는 말에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 의미를 계속해서 찾아본다.

그리고 마지막 수료학기를 준비하며, 항상 말로만 해왔던 [성 정체성]에 관한 영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그것들을 시나리오 어떻게 만들까 요리조리 궁리하며 준비과정을 보냈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척될 수록, 내가 하고 싶은 메세지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현재진형형인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는다던지, 무슨 얘긴지 나만 아는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었다. 마지막으로 글을 쓰고, 성정체성에 대한 나의 의견을 A4용지에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항상 먼저 말하게 되는 영상팀 안에서도 같이 있던 작업장학교 안에서도 어느정도 공유가 되었었고, 그렇게 영상은 촬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편집하는 과정에서도, 자꾸만 이야기가 엇나가기 시작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써내려갔을 때와는 달리, 자꾸만 '우리는 나쁘지 않아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그것마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힘들었는지 점점 내 안에서만 감동하고 웃을 수 있는 영상이 되고 있었다. 상영회 날이 되었지만, 영상은 상영회 준비를 하지 못했다. 아직도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만 말하기를 원했었다.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상으로 아직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서툴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하려는 [성정체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의 경험' 만으로 이루어져 부족한 것인지 헷갈리지 시작했지만, 지금의 결론은 이야기도 부족하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것이다.

3-1 나는 왜 카메라를 들고 있나요?

지난 2008년 8월, 캐치스코프는 도쿄슈레대학에서 진행된 도쿄슈레국제영상축제에 하자의 영상팀이었던, Visual rave가 제작한 'KTX : 300km 가 들려준 침묵과 함성'과 '고스트 걸즈'가 초청되어, G.V를 하러 가게 되었다. 그리고 4박 5일간 일본에서 머물며 도쿄슈레대학에 재학중이던 '메구미'에게 "카메라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 질문에 "가장 나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거울" 이라고 대답을 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나의 대답이 내 머릿속에서 오래 있었다.'거울' 로만 으로 카메라를 들기엔, 카메라는 무겁고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 겨울, Save my city project로 제작한 '황금도시'가 상을 받고,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 상을 수상실적으로 인정해주는 학교들이 있었고, 마치 아무이상없다면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생겼다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희망이 사실은 불안했다. 과연 이것이 내가 하고싶은 것인지 라는 고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니어 4학기 수료에세이에서도 확실하지 않았고, 8월이 들어서도 확실하지 않았다. 2년 반 동안 손에 익었던 것을 놓아버리기엔 사라질 것 같아 무서웠고, 다른 선택의 폭이 뭐가 있을까 도저히 보이지 않았었다. 다가오는 시간들을 거부하고 싶었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선택해야하는 순간들이 온다. 내가 어떤 것을 바라고 원하는지 말해야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순간이. 유란이가 나에게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뭐야?" 라고 물었다. 나는 우물거리다가 "여성학"이라고 대답했다.

영상이 내 안에 사라질까봐 두려워했었던 것도, 폭이 없어보이던 것도 내가 너무 급하게 생각해서는 아닐까 싶다. 당장이라도 며칠안에 사생결단을 내거나, 한번의 선택으로 그 다음의 기회가 결정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자에 처음 입학했을 때의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지금 하고 싶은 것이 다르고, 내가 지금 선택했다고 해서 '평생'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않는다. '평생'을 말하기엔, 아직 이른 감 있는 18살이다. 분명 하자작업장학교에 입학한 것은 18년 중 '대단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이제야 18년을 살았고, 내 앞에는 18년의 몇 곱절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하자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한순간에 인생이 결정되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서 여러 가지를 배웠을 뿐이다. 그러나, 2년반 그리고 18년동안 알게된 것은 내가 앞서말한 상황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뿐더러, 찾아오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Epilogue

나에겐 11살짜리 동생 수진이가 있다. 수진이는 가끔 자기는 서울대를 들어가지 않으면 유학이나 가겠다고 이야기하고, 내가 거기서 뭐하게? 라고 질문하자 "글쎄.."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물어본다. 언니는 대학 어디 갈꺼야? 가서 뭐 할꺼야? , 나는 "여성학" 이라고 대답을 했는데 수진이가 그 후에 뭐 할꺼냐고 유명하지도 않고 라고 툴툴거린다.

만화와 하자처럼, 좀 더 많은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과 기준이 있는 곳에 빠져 있었다보니, 수진이가 나보다 더 현실적일지 모른다. 대학 졸업 후엔, 당연히 취직이고 어떤 곳을 가야 좋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좋은 것인지 나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것이 꿈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하다보면 되겠지 하는 종류의 꿈 말이다.

어느새 가슴을 보이기 싫어 온통 움츠렸던 나는, 어깨를 피고 앞을 보고 걷게 되었고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이 많아졌다. 멋있는 사람을 찾아, 그 사람처럼 되고 싶었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변화하기 위해선 변화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만화책처럼 '한 달 후, 6개월 후, 1년 뒤' 와 같은 말로 나의 시간은 축약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있었기 때문에 한 달이 생겼다. 그리고 그 한달이 쌓여서 한 학기가 지나고 수료를 하기 까지 지난 4학기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마주하고,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길을 걸으려 가야 한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들어본 적 없는. 내가 만들고 걸어가야만 하는 길을. 그 길에 있는 항상 옳고 그른 것, 좋은 것 나쁜 것이라는 생각 이상의 것을 가지러 간다. 고대 페르시아 시인 루미가 말한 "틀린 행동과 옳은 행동이라는 생각을 뛰어 넘는 것이 있다. 거기서 만나자' 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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