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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12 수료/Essay

에세이 1-9


Prolougue

길찾기 프로젝트 중 '걸어서 바다까지' 라는 프로젝트가 있다. 총 9박 10일, 영등포동에 위치한 하자센터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낙산에 있는 동해까지 가는 프로젝트이다. 길찾기 과정을 경험했던 죽돌 중 많은 수가 이 프로젝트를 좋아한다. 왜인지를 모르겠다, 생각없이 걷기만 하면 목표에 닿아서인지, 바다가 좋아서인지. 나는 이 프로젝트를 좋아한 적이 없다. 걷는 동안, 발이 너무 아팠고 오랜 시간 차도에 라도 뛰어들어, 안전차량을 타고 싶었다. 시작할 때 들뜨던 마음도, 같이 가던 사람도 걷다보면 아무것도 않았었다.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어려웠었다. 눈을 뜨면 바다였음 좋겠는데, 나는 뜨거운 도로위에서 걷고 있었고 한달음에 내달려 숙소에 도착하고 싶었는데, 물집투성이 발과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속도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이 프로젝트로 시작을 여는 것은 한달음에 내달려 갈 수 없었던 '바다'와 같은 2년이 걸바와 닮았기 때문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캐치스코프의 누구처럼 멋있어지지도 않았고, 때깔나는 영상이 나오는 쇼하자도 아니었다. 매일매일 하루가 있었다. 나는 그 하루를 걷고 있었다.

아직 내 인생의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자안에서 찾으려 했던 '바다'는 걷다보니 가까워져있었다. 3일을 걷다보면, 주변이 보이고 같이 있는 사람이 보인다. 힘들었던 것도 조금은 덜 힘들게 느껴지고, 무거운 가방도 이미 자연스러워져있다. 3일을 되기까지 1년이 걸렸고, 바다를 본 9일이 되기까지, 2년 반이 걸렸다.

걸어서 바다까지 영상팀이었다. 그리고 영상팀을 하면서 편집을 해봤다며, 길찾기 평가테이블에서 영상팀을 추천받았다. 길찾기 과정을 하면서, 해보고 싶었던 것 많았지만 정작 뭘 해야할지 몰랐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잡아봤다. 아니, 이건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얘기다. 그 때의 나는 다른 것 때문에 매우 혼란스러웠고, 추천을 받았으니 가야지. 라는 생각이 강했다. 내일은 막막하고, 오늘은 이상하다. 그런 하루였다. 내가 영상팀이 되기 전, 어느 날까지는.

1. 시작하는 준비

처음 주니어 1학기가 되어 캐치스코프 란 영상팀에 참여해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Focus on interview project'였다. 관심있는 직업인들을 선정하고, 팀을 나눠 인터뷰하는 프로젝트였는데 나는 케이와 토토와 함께 이언희 감독의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팀의 인터뷰는 다른 팀보다 늦어, 다른 팀이 인터뷰하는 것을 보며 "추가 질문도 준비해야지", "중심단어는 적어야지" 같은 tip을 얻어가고 인터뷰를 하게 되었지만. 정작 그날에는 떨리는 마음에 인터뷰질문 이상의 질문을 하지 못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언희 감독님에게 후광이 비췄다." 라고 말했고 그 후광을 본 사람은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현장에서의 지휘자가 되는 감독, 자기에게 갇혀있기 보다는 소통이 되어라 하는 의미에 화살표를 남기고 간 이언희 감독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렇게 가볼까 저렇게 가볼까 하지 않고, 열심히 하다보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감독이 되었고 영화를 찍었다. 내가 만나보지 못한 김점선 씨는 매일 매일 그림을 그리셨다. 해야지 라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생활이고 일상이고 습관이었다. 나는 그 누구를 만나든 사람들에게 후광을 발견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만나려던 사람들 중 하나도 자신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었고, 각자의 길과 경로에서 그것을 삶에 녹여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깐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자, 내 주변에도 그렇게 멋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고민의 한가지는 영상팀을 들어오고 나서, '난 왜 여기에 있는가' 였는데 영상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딱히 절실하게 하고 싶지도, 그러지 않고 싶지도 않은 미지근한 채로,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야, 이 사람들이 얼마나 이곳을 중요하고 생각하고 이 자리에 앉아 머리가 터지토록 회의하고 있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107호가 좋았고, 같이 하는 사람이 좋았고 제일 인 것 영상이 좋았기 때문이다. 미적지근하게 돌아다니던 나에게 유리가 "영상이 1순위가 되어라" 라고 하였다.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함께하고 즐겁고, 나도 영상이 즐거웠으면 좋겠었다. 나는 전부를 바쳐야겠거니 싶었다. 길찾기 때부터 해온 적당히 회의에 참여, 작업하기, 관계맺기 했었던 것이 아니라. 생활의 전부를, 만남의 전부를 혹은 인생의 전부를 여기에 쏟아부어야했다. 그래야만이, 절박하고 절실하게 이곳에 있을 것이고, 나의 미래에 이 사람들과, 영상과, 지금 생각들이 함께 이어질테니깐.

인터뷰 영상을 편집하고 길찾기 평가 테이블 이후 내 머릿속에 있던 질문에게 답하게 되었다. 질문은 "영상을 할꺼야?" 였고 내 대답은 "응" 이었다. 이제서야 마음속의 1순위가 되어가는 것 같았고, 이왕 잡은 카메라 알 때까지 잡아보자 싶었기 때문이다.

2. 출발 전, 신발끈을 묶어야

그러나 카메라를 잡는다 고 다짐하는 것 만이, 이 팀에 섞일 수 있게 되거나 멋있는 사람을 향하는 나를 도와주는 것은 아니었다. 다짐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학기의 중간이 되어서야 동기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생각해봐야 했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이야기 하는 것' 이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서로가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고 내가 지금 어떤 것이 필요한지 스스로가 알아볼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07호 안에서 이야기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고, 조금씩 조금씩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회의시간만 되면 입을 다물기 십상이었는데, 사람들이 멋있어 보여진 후로 내 이야기가 보잘 것 없게 느껴졌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듣고있소!'라는 신호만 보낼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말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영화를 통해서였다. 감동받거나, 궁금하거나 알게 된 것을 말할 수 있었는데, 영화를 보는 것이야 말로 내 이야기를 하기엔 가장 좋았다. 어떻게 보던 정해진 것이 없었고 읽히면 읽히는 데로 읽고, 느끼고 감동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깊게 감정이입하며 영화를 보던 나는, 어떤 영화냐에 따라 화로 얼굴이 붉어지거나, 울어서 부은 눈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기도 했다. 나는 지금 이렇게 느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보고 느꼈는지 궁금해졌다. 107호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해?" 라는 질문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 서로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나 싶다. 어찌되었든 그 질문은 내가 생각을 지속하게 되는데 큰 힘을 주었다. 아무도 없이, 혼자 영화를 볼 때도 나는 내가 느끼고 보는 것에 "왜 그렇게 생각해?" 라고 질문하게 되면서 좀 단단한 내 이야기들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바다를 향해가는 여행이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아직은 떨리는 마음으로 마지막 신발끈을 묶었다. 107호에서는 젠더감수성에 관한 주제로 매주 수요일 담임반 시간을 사용했었는데, 나의 마지막 신발끈은 그것이 아니었나 싶다. 남자와 여자의 분리된 모습에 염증을 느끼고 "도대체 왜!" 라고 생각만 하던 내가, 정말 남/여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성적 평등 어린이 X이야기' 를 읽으면서 그렇게 느꼈다. 여/남성적이지 않은 놀이, 옷, 말투, 엄마와 아빠의 역할들이 그 안에 있었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X는 초등학교에서 정말 '다른'아이가 되어서, 살았었다. 겉모습에 따라 '남자같다.' '여자같다' 라는 말을 들은 나는, X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흥미진진하게 읽지 않았나 싶다. 성으로 나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니! 이것이 이야기라도! 정말 그럴 수 있는거 아니야? 그럼 나는 뭐지? 라는 질문들이 있었다. 여성, 남성을 택하기엔 이미 늦어버리지 않았나 싶었고, 지금의 나는 둘 다 섞여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야기의 마지막, X의 성을 궁금해하던 '성난 부모'들은 (왜냐하면 그들의 자식이 X처럼 모호하게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깐) 결국 양호선생님의 검진으로 X의 성을 알아내려고 했다. 양호선생님과 X는 검사가 끝나고 교실에서 나왔는데, 선생님은 감동하며 "이렇게 건강하고 정상적인 아이는 처음봤다.여러분이 성을 궁금하지만, 그건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왜 '성' 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 너무 성으로 나눠진 것이 많아서 '나누지 않음' 안되는건가? 라는 생각을 했다.

성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아직 준비가 안되서 이야기를 하지 못할 때면, "괜찮아, 조금 있다해도 되" 라고 말해주었다. 가장 말하기 힘들었지만,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성정체성'에 대해 내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건 다름이 아니라, 107호 안 사람들과 그들이 준비한 '담임반'같은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3. 첫 스텝

처음 나의 개인쇼하자는 지난 4년간의 이야기가 담긴 [마주선 뒷모습]이라는 슬램비디오였다. 짧은 머리와 여성스럽지 않은 옷 스타일과 말투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궁금증이었고, 매일같이 들려오는 질문에 여자이기를 포기하고,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었다. 그렇게 가슴을 붕대로 묶고 머리를 더 짧게 짜르고, 여성스럽다는 눈을 안경으로 가리면 남자가 될 줄 알았지만, 정작 그렇게하니 '여자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피할 수 없지만, 묻어두고 싶었던 그 4년 이야기를 짧은 영상안에 담아보았다.

남과 연결할 수 있는 영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내가 카메라를 들고 이야기를 해본 첫 영상이었다. 관객들은 박수를 치고, 세이랜은 잘했다며 등을 쳐주었다. 이곳은 여성과 남성, 그것을 겉모습으로 나누지도, 성에 관한 역할을 정하지도 않는 동네라고 생각했다. 영상은 내가 묻어두고 싶었던 그 뒷모습과 마주한다고, 뒷모습도 나였고 묻어두지 않은 채 걸어가겠다고 이야기했다.

두려움 속에 마무리했던 쇼하자는 끝났고, 이제 새 학기를 맞이하는 문이 열렸다.

그리고 혼자 웅얼거림이 길어지던 때, 방학 중 프로젝트로 Pink haja 라는 것이 진행되었다. Pink haja를 떠올려보면 계절이 여름이다. 분명 겨울에 진행된 프로젝트였고, 뜨거운 열기에 에어컨을 켜둔 기억은 없는데, 몸은 어쩔 줄 몰랐고 방은 더웠고 이야기는 Hot했다. 나처럼 성정체성에 관해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고, 연애관계에서 남/여의 위치와, 부모님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까 머릿속에서 생각하다가, 실제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을 보게 되니 '성'에 관해 고민하던 사람이 나 혼자구나 라는 것을 알았다. 항상 107호안에서 익숙한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하다, 낯설은 사람들 앞에서 처음 이야기 해봤다. 겁낼만큼, 격한 반응도 화난 사람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없었다. "너는 그런 경험을 가졌구나" 라는 이야기와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기대하게 되었다. 이정도의 관심, 감정, 지식이 있다면 나중에 우리가 함께 모여 다시 이야기를 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고민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고, 고민을 경험과 이야기로 풀어내는데 Pink haja가 디딤돌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 순간에 하자의 모든 사람이 '성'에 관해 열린 눈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아니, 성에 관해서 라기보다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에 관해 열려있다고 했던 것 같다. pink haja가 끝나고도, 여전히 나를 남자대하듯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동성애자라며 안 좋은 시선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는 커밍아웃 끝에 관계가 단절되는 상황도 있었다.

3. 내가 힘든 것 이상이 보이는 3일

주니어 2학기를 맞이하며, 많은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나의 2학기 메인프로젝트라고 말할 수 있는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프로젝트도 있었다. 이 프로젝튼 소규모로 이뤄진다고 하였고, 여기서 다뤄지는 것들은 들어만 해보지는 못한, 여성학, 미술, 철학, 과학, 기호학 등등이 있었고, 꽤나 많은 지식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리고 가장 기대되었던 것은, Pink haja가 끝나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아무리 한번,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지 않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다 보면 지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사님들은 '토론'하는 자리를 많이 만들었었는데, 그 자리는 의도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에는 얼떨떨하고 당황스러웠던 것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강사님들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공부가 연결되는 것이었다. 강의에선 철학과 니체란 주제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면서 니체가 말하는 '낙타'를 알게 되고 크게 낙타에 공감하게 되었다. 모든 짐을 지고 가며, 불평하지 않는. 그리고 쌓여가는 화의 화살을 자신에게 던지는 낙타는 나와 같았고. 낙타를 말하는 자리, 나는 알몸의 실험체가 되어, 사람들에게 관찰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같은시기 참여했던 [주말영상학교] 프로젝트에서, 더 이상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나에 관한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구상하게 된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하자작업장학교에 입학하기 얼마 전, "좋은 가정에서 왜 하자를 오느냐" 라는 질문을 받았다. 가족에 관한, 나에 관한 앞으로의 이야기의 자리에서 입을 다물게 된 계기였다. 복에겨워 자신의 눈앞의 행복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두려웠고, 내가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감지못하는 '행복'에 불평하는 것이 남에게 될까 무서웠다. 그리고 저 말은 빠르게 기억에 묻혀갔지만, 탈경계 인문학 시간과 주말영상학교에서 내가 경험했던 나만의 이야기를 하며,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의 첫 단편영화 [빨간약]을 제작한 것은, 그즈음 가족에 관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꿈에선 엄마가 죽었었는데, 일어나 보니 내 베개는 눈물로 젖어있었고, 그 순간 그 짧은 순간 모든 것이 없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너무 강렬해, 시놉시스를 쓸 수 밖에 없었다. 처음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이건 엄마가 아니야" 라고 코멘트를 받았지만, 그 코멘트를 난 뒤 "그건 그 사람의 엄마고, 이건 너의 엄마지. 좀 더 솔직하게 써보렴" 이라는 코멘트를 받았다. 빨간약은 절대 담담하게 쓰여지지 않은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처음 영화를 만들면 으레 나온다는 '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다 시작이 아닌가 싶다. 영상으론 처음이겠지만, 이미 사람들에게 말해보고, 그것이 잘못되거나 나쁜 것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을 경햄했다. 여기까지 오는 것이 전혀 쉽지 않았다. 차도 뛰어들고 싶을만큼 괴로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하다보니, 말마따나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글거리는 '내 상처' 와 연민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한번을 경험했고, 이야기하는 것에 부담감이 덜어진다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지' 않았다.

3-1 그럼 넌 왜 카메라 들었나요

지난 2008년 8월, 캐치스코프는 도쿄슈레대학에서 진행된 도쿄슈레국제영상축제에 하자의 영상팀이었던, Visual rave가 제작한 'KTX : 300km 가 들려준 침묵과 함성'과 '고스트 걸즈'가 초청되어, G.V를 하러 가게 되었다. 그리고 4박 5일간 일본에서 머물며 도쿄슈레대학에 재학중이던 '메구미'에게 "카메라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 질문에 "가장 나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거울" 이라고 대답을 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나의 대답이 내 머릿속에서 오래 있었다.'거울' 로만 으로 카메라를 들기엔, 카메라는 무겁고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 겨울, Save my city project로 공동 기획 및 연출한 '황금도시'가 상을 받고,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 상을 수상실적으로 인정해주는 학교들이 있었고, 마치 아무이상없다면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생겼다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희망이 사실은 불안했다. 과연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인지 라는 고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니어 4학기 수료에세이에서도 확실하지 않았고, 8월이 들어서도 확실하지 않았다. 2년 반 동안 손에 익었던 것을 놓아버리기엔 사라질 것 같아 무서웠고, 다른 선택의 폭이 뭐가 있을까 도저히 보이지 않았었다. 주니어 1학기 때부터 함께한 토토와 유란이는, 영상관련한 곳으로 진학하고 시니어를 준비한다고 하였다. 나는 다가오는 시간들을 거부하고 싶었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선택해야하는 순간들이 온다.
매번 사람들은 수료준비한다고 말을 하면 "너 그럼 뭐할꺼야?" 라고 묻는다. 영상은 아니라고 대답하면 놀라는 얼굴과 함께, "그래 그게 좋을거야"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저 질문은 막연하게도, 대학이나 나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나는 보다 구체적인 나의 확신이 필요했다. 언젠가 유란이가 나에게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뭐야?" 라고 물었다. 나는 우물거리다가 "여성학"이라고 대답했다.

영상이 내 안에 사라질까봐 두려워했었던 것도, 폭이 없어보이던 것도 내가 너무 급하게 생각해서는 아닐까 싶다. 당장이라도 며칠안에 사생결단을 내거나, 한번의 선택으로 그 다음의 기회가 결정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결정을 하는데에 확신은 필요하다. 내가 정말 이것을 하고 싶고, 더 해보고 싶은 것이라는 확신. 나는 '여성학' 을 좀 더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게 확신할 때 까지, 내가 가진것에 대해 확신하는 것을 '영상'으로 배웠다.

하자에 처음 입학했을 때의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지금 하고 싶은 것이 다르고, 내가 지금 선택했다고 해서 '평생'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않는다. '평생'을 말하기엔, 아직 이른 감 있는 18살이다. 분명 하자작업장학교에 입학한 것은 18년 중 '대단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이제야 18년을 살았고, 내 앞에는 18년의 몇 곱절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하자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한순간에 인생이 결정되지 않았다. 나는 이제야 여기서 말하는 '바다'에 도착했을 뿐이다. 탈학교 했다고 해서,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고 내 삶에서 내가 하고싶은 것을 찾았고, 이제 그것을 해보려고 하는 참이다. 이제 시작일까? 아니 시작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작은 모든 것의 처음인데 난 처음을 경험했고, 해보려고 하지만 이미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 보이지 않는다 는 생각이 든다.

3. 마지막 9일

2008년 9월, summit을 준비하면서 하자의 이곳저곳에서는 영어가 많이 보였다. 그리고 하자의 7가지 약속의 영문판을 보게 되고, 약속 중 성차별이, sex의 차별이 아닌 gender의 차별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보자 속에서 무언가 '욱'하고 올라왔다. 2가지 이유에서였는데, 하나는 '정말 하자라는 동네는, 생각의 폭이 넓구나. 이곳은 다른 곳이고, 행복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겠다.' 였고 또 하나는 '이 약속을 누가 읽어봤을까, 죽돌 중 누가 '성차별'의 '성'이 젠더라는 것을 알고, 동성애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까' 였다. 만약 나 말고 누군가 알고 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마지막 주니어 4학기를 계획하면서 '페미니즘 공부모임' 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었다. 죽돌들의 참여가 우선이고, '여성의 힘이 강하다.', '여성주의에요~', 라는 말이 판돌들이 알려줘서가 아니라, 죽돌들 스스로 배우고 알게 되면서 말하길 바랬고, 제일 중요했던 건 '성'에 관한 것에 대한 '무지'를 보면서 더 이상 나 혼자 화내고 열내고 성내면서 속썩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이고, 모임은 시작했다. 나는 반장이었고, 공부할 텍스트를 찾고, 주제를 잡거나 잡힌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찾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성'에 관한 이야기에 관해서,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적었다. 예를 들면, 명절이 되면 왜 엄마들은 주방에, 아빠들은 티비앞에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을 가지고 토론했었다.

물론 어떤 프로젝트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잘 진행되지는 않았다. 자기 경험과 연결되지 않은 지식들을 주로 얘기하기 쉬웠고, 그 지식들은 우리가 이정도 알고 있다. 라며 서로의 깊이를 알 수 있었지만, 주변에서 들었던 것으로 끝나 짧은 깊이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자기 경험과 연결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자기와 먼~ 얘기를 하면서 지식은 쌓여가겠지만 '성찰'은 없는 것이고, 결국 바른말만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는 우려가 있었다. 내가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과 지금껏 배운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의 삶을 텍스트화 시켜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나의 주변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나 부터 변화하고 반응하고, 좀 더 넓은 세계를 보는 것. 그러면서 ! 절 대 ! 자기이야기에 사로잡혀, 남을 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기획한 모임이라, 진행이 잘 되지 않을 때마다 괴로움과 죄책감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저것을 말하면서도, 나도 '공부'하고 있지 않았고 어느 순간 책을 보지 않았었다. (물론 책을 보면서도 작가의 글을 '이것이 진리, 따라야할 의무, 이것만이 해답'이라며 보는 것은 공부라기 보다, 자칫 허울좋은 말이 될 수가 있다.) 책을 보지않는 다는 것은, 앞서 말한 '주변'을 가지고 오는 걸 나도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함께한 공부모임은, 어느새 페미니즘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모임'이 되어갔었다.

같은 학기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 세계를 뒤흔든 8명의 독일인] 이라는 프로젝트를 참여하던 중 받았던 과제가 생각난다. 모든 강의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지난 8명을 돌아보며, 기억에 남은 키워드를 뽑고 그에 관한 짧은 소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가장 하고 싶은 키워드를 고르고 관련 자료를 읽고, 찾고, 정리하면서 책에서 말하는 것을 긁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이야기와 생각을 근거 있게 만들어보는 것을 경험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 것' 이라는, 동기화와 즐거운 시작이었고 진리처럼 여러 이야기를 녹여놓은 것에 감동하고, 그것에 대한 내 해석을 붙여보는 것이었다.

공부를 함께 한다는 것은, 시작부터 함께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만의 '논문'을 써본 것 처럼, 어떤 주제나 이야기에 관해 자기가 생각하고 그 생각을 단단하게 만들 '실례'나 이론들을 참고해야 하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과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혼자서 시작하고 나중엔 함께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잊으면 안되는 것은 그 공부는 '함께'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계속해서 해야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들으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페미니즘' 이다. 앞서말했듯 처음 혼자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담임반 시간에 '젠더 감수성' 을 알게 되며, 처음 듣게 되었던 단어였고 그것이 시작이었지만, [마주선 뒷모습]을 만들며 부정해왔던 것의 생각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여성학'을 배운다면, 나는 어떤 것을 배우게 될까? 세이랜은 지레 겁주시며, 지금 하는 것처럼 배우진 않을지도, 배운 이야기보다 더 적은 이야기를 할지도, 꽤 보수적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아직 대학을 경험해보지 않았고, 한국사회의 이야기들을 읽고 해석해본다는 커리큘럼에 "여기에선 어떻게 보고, 어떻게 해석할까?" 라는 기대가 있다. 나보다 더한 시간을 공부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와 비슷할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실은 내가 만약 좀 더 알고 있다면 "쟤 왜 저렇게 나대" 란 말을 들을까 겁나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뭘하든 It's all my fault도 아니고, It's only my jod도 아니다. 지금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더 많이 알게 될 것 같다. 희망은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은 목표가 되기도 한다.

Epilogue

나에겐 11살짜리 동생 수진이가 있다. 수진이는 가끔 자기는 서울대를 들어가지 않으면 유학이나 가겠다고 이야기하고, 내가 거기서 뭐하게? 라고 질문하자 "글쎄.."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물어본다. 언니는 대학 어디 갈꺼야? 가서 뭐 할꺼야? , 나는 "여성학" 이라고 대답을 했는데 수진이가 그 후에 뭐 할꺼냐고 유명하지도 않고 라고 툴툴거린다.

만화와 하자처럼, 좀 더 많은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과 기준이 있는 곳에 빠져 있었다보니, 수진이가 나보다 더 현실적일지 모른다. 대학 졸업 후엔, 당연히 취직이고 어떤 곳을 가야 좋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좋은 것인지 나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것이 꿈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하다보면 되겠지 하는 종류의 꿈 말이다.

어느새 가슴을 보이기 싫어 온통 움츠렸던 나는, 어깨를 피고 앞을 보고 걷게 되었고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이 많아졌다. 멋있는 사람을 찾아, 그 사람처럼 되고 싶었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변화하기 위해선 변화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만화책처럼 '한 달 후, 6개월 후, 1년 뒤' 와 같은 말로 나의 시간은 축약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있었기 때문에 한 달이 생겼다. 그리고 그 한달이 쌓여서 한 학기가 지나고 수료를 하기 까지 지난 4학기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마주하고, 하루를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찾던 '바다'는 저기 멀리, 서울에서 강원도 같은 구체적인 거리도 아니고, 눈을 뜨면 닿아있을 곳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처럼 계속해서 걸어가면 닿을 곳이다. 걸어가며 아픈 것도, 힘든 것도, 같이 걷는 것도 알아가게 되고, 혼자의 속도에 집중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바다'는 고대 페르시아 시인 루미가 말한 "틀린 행동과 옳은 행동이라는 생각을 뛰어 넘는 것이 있다. 거기서 만나자'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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