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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12 수료/Essay

에세이 1-1

8월 2일이다.


이젠 말복도 오고 장마도 끝났고 매미는 왕성하게 울고있다. 여름이 온 것이다.

내 처음의 기억을 회고하며 '여름' 이라고 말했다. 너무나 뜨거웠던 여름. 날이 밝기 때문에 오랫동안 놀 수 있었지만 그 햇볕에 살갗이 타들어가기도 하는 그 여름이 왔다. 나의 2년 반, 그리고 삼년을 떠올려본다. 계절은 모두 시간대로 왔다갔지만, 난 언제나 여름이었다. 나에게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니었다. 시작이 여름이었기 때문에, 끝도 여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18년을 살면서 18번의 여름을 맞이하였다. 더위를 많이 타는 까닭에 여름 밤은 항상 길었고 잠에서 깨어나면, 혹시 모기에 물린 자국은 없는지 항상 살펴보았다. 내가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지도 모른다. 땀이 많기 때문에 여름이 되면 '탈수'가 몸에 익어야 했고 모기에 잘 물리기 때문에 청각이 예민해졌었다. 이젠 모기소리에도 잠을 깨지 않고 더위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관심해진 것인지 아니면 무뎌진 것인지 익숙해진 것인지. 하나라고 할 수 없다. 모두 다 맞는 말이다.


모든 것은 여름에 시작한다.


처음 미래와 연결된 꿈도, 지금 수료도, 나의 첫 외국방문도, 처음 해본 공동작업도, 내 손에 무언가를 쥐고 이야기 해본 것도, 처음 긴 글을 써본 자서전의 시작도.


모두 시작은 여름이다.


더운 것은 싫다. 후덥지근한 것도 싫고, 뜨거운 것도 싫다. 땀이 온 몸에서 피어오르면 사람들과 함께하기도 싫어진다, 서로에게 짜증만 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끈적끈적 치덕치덕, 떠오르는 느낌은 불쾌한 것이다. 처음 999에 올라갔을 때, 조명에 눈이 부시고 앞이 하나도 안 보였던 적이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기억할 수 없었고, 내가 왜 노래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던 날이었다. 그 때는 꽤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을 벗을 수 없었다. 그렇게 여름이 시작되었다. 덥고 후덥지근한 뜨거운 여름이 그 날 시작되었다.


다시 999무대위에 올라왔을 때를 잊을 수 없다. 노리단, 걸어서 바다까지 영상, 자서전 낭독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노래로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 프로젝트의 쇼하자였다. 팀을 3개로 나눠 각자 주제를 가지고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나는 모모반 학교폭력을 주제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연극에 주인공 지영이었다.


이 아이는 교우간의 관계가 원만하던 중 지영이를 시기하던 힘 있는 아이가 학급반에게 놀지말라는 말을 하곤, 고립된다. 나중에 전학오는 아이와 친구가 되며 그 전에 친하던 아린이와 한때를 즐겁게 보낸다. 그러나 아린이는 힘 있는 아이와 지영이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고, 결국 지영이에게 등을 보인다. 지영이는 자살한다. 마지막 옥상에서 집단폭행을 당하던 중, '그냥 친구가 되고 싶었어' 라는 말을 남기곤. 그 후로 아이들은 참회하고 훈훈한 내용의 합창으로 극은 막을 내린다.


나는 자살하며 눈물을 흘렸었다. 지영이에게 감동하거나, 내가 지영이가 된다는 등 배우가 느낀다는 역할에게 빠진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떤 것이 나를 붙잡았다. 여기 아무 기댈 곳없는, 자신의 꿈을 이어갈 용기가 없는, 미래를 꿈꾸지 않고 그러나 아무에게도 피해주지 않으려고 죽기를 결심한 아이있었다. 소심하고 볼품없다. 그건 내가 죽이고 싶은 나였다. 나는 그렇게 몇번이나 죽었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만들어온 나를 죽이고 또 죽이고 새롭게 '그런' 나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소탈하고 덤덤하고 솔직하고 시원스래 잘 웃는 그런 사람말이다.


내가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이 두려웠다. 그것을 보고 관계가 틀어질까봐 실망시킬까봐 여기서 나가라고 할까봐. 안되는 것은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런' 내가 필요했다. 주니어 1학기, 나의 첫 영상의 이름은 [마주선 뒷모습] 이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앞만 보던 내가 스스로 보고싶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존재하던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를 본다는 것이었다. 999조명이 뜨겁지 않았던 그 때, 자각하지 못했지만 나는 내 뒷모습을 마주했다.


길찾기의 마지막 평가 테이블, 변의 걸어서 바다까지 평가서에서 뒷모습을 들켰다.

거기엔 웃고있지 않고 생각하는, 꽤나 우울하고 음침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를 봤다고 적혀있던 것이었다. 완벽하게 가렸다는 생각했던 것은 다른 평가서에서 '아니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봤습니다.' 라는 말로 낱낱이 적혀있었다. 이 어른들은 알고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아직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괴감이 밀려온다. 왜 이렇게 완벽하지 못했나. 이젠 아무 의미가 없다. 그 모습이 아닌 나는, 보다 솔직하게 느끼고 말하려던 나는 가두고 또 압박하고 붕대로 칭칭 감아버려서, 뭉그려뜨려진 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여름이 찾아왔다. 이건 너무 뜨거워서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혼란스럽다. 걸어서 바다까지 영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해봤던 것을 해보라는 추천에 영상팀을 하겠다고 했다. 처음 방학프로젝트의 시작은 여름이다. 내가 자서전을 쓸 때의 시작처럼 햇살에 데일만큼 뜨거원 여름이었다. 영상팀의 방학 프로젝트 첫 날, 영등포 시장에서 1시간 가량을 헤맸다. 더워서 땀은 나고 너무 땀을 흘려서 더위를 먹었다. 눈 앞은 흐리고 머리는 어지럽다. 그러나 가장 나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모습의 내가 방학 프로젝트를 참여하는지, 라는 것이었다.


Focus on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다. 방학 중 프로젝트가 끝났고, 결국 영상팀을 하겠다고 결정했다. 혼란스럽고 어지럽다면 포기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뭐든 나중에 하는거랑 연결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짧게 짧게 배우고 들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방학 중 프로젝트에서 '편집에 감이있네' 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뭘 잘하는지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그나마 잘 하는 것을 하자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 들어오니 진행된 프로젝트는 Focus on interview 프로젝트였다. 만나고 싶은 직업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자. 라는 심플한 목표가 있었고, 우리를 위함이기도 했지만 다른 10대들을 위함이어서 '청진기'팀과 함계 진행했었다. 처음 누구를 만날까 하는 회의에서 여러명의 이름이 나왔다. 나는 내가 아는 (게다가 유명한) '김점선' 씨를 만난다고 했었다. 기대만발, 사진 과 티비 그리고 자서전 속에서 만나는 사람을 실제로 만나는구나 하는 설레임이 있었다.


름사와 같이 찾아보면서, 작업하는 사람과 가족과 살아가는 사람. 집중하고 싶은 것과 해야하는 것, 들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고 질문리스트를 만들었다. 집주소를 알려주시면서 이야기를 해주는 것부터 기대하고 감동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하진 못했다. 김점선씨의 건강악화 때문이었다. 맥이 빠져버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알고 물어볼게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고, 그만큼 물어보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누구든지 좋아. 라는 생각으로 토토와 이언희 감독의 [ing]를 봤다. 짧게 리뷰하자면 부드러우면서 뻔할듯한 이야기를 전혀 뻔하지 다룬 영화였다. 도대체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하고 궁금해졌다.


얼굴하나 보이지 않았던 프로필 사진으로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을 기억한다. 처음 103호에 훤칠한 키와 진한 파란색의 옷을 입고, 강렬한 인상을 가진 그녀를 만난 것을 기억한다. 후에 그녀를 만난 후 편집을 하며 우리의 컨셉은 '화살표'였다. 영화감독은 트럭운전수라면서 지휘자라고 상황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만, 그것에 좌우되진 않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점선씨는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셨다고 한다. 타블렛으로 그릴 때도 유화일때도, 큰 종이를 채우며 그리고 싶은 것 생각나는 것을 옮기셨다고 한다. 이언희감독은 화살표를 가지고 앞으로 나간다. 김점선씨는 살아가는 것 처럼 앞으로 걸어간다. 지난 2009년 봄학기 수료식 때, 나는 불씨를 가지고 앞으로 나가는 사람에 대한 블레싱 멘트를 썼다. 열정과 지속성이 있고 그 중 하나가 없을 때, 예를 들어 열정이 사라져도 계속한다면 열정은 다시 생긴다고 썼었다. 김점선씨와 이언희감독님은 그런 분이었다. 아직은 내가 뭘 해야할지 왜 해야할지 막막했다. 그렇지만, 정말 이게 맞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더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직 반년도 아닌 3개월을 해봤었고 영상을 해봤다 라고 말하기도 애매했고, 아직 결정하기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비디오 꼴라쥬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은 영상을 제작하는 기간보다 가사를 쓰는 과정이 더 길었다. 고민의 시간도 그만큼 길었는데, 자서전을 하면서 가볍지만 한바탕 지나온 내 인생사를 훑었던 것을 생각해봤다. 과연 내가 한학기동안 가장 많이 변한게 뭘까 생각을 하다가, 나를 조금은 인정했지! 라는 생각을 했다. 평가테이블 이후 앞/뒤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에게 왜 라는 질문을 많이 했었다. 예를들자면 총 4년 동안 길러온 '웃는 것'에 대해서, 정말 즐거울 때 웃는걸까? 하는 질문이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프로젝트를 참여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캐치스코프라는 팀 안에서 서로에게 신경써준 다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 이상 멍석방을 찾지 않게 되었고 107호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먼저 질문하기도 하지만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질문하는 것을 기다려주는 사람, 코멘트를 비판이 아닌 비평으로 받아들이라던 사람, 가볍게 넘기는 농담이나 이야기에 대해 진지하게 '왜?'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것은, 다르다와 틀리다 의 차이를 알게 된 것이었는데, 이것은 107모임에서 진행된 젠더감수성에 대해 배우는 시간에 알게 된 것이었다. 다르다(different)와 틀리다(wrong)을 흔히 잘못 쓰게 되는데, 사람과 사이에서는 틀리다는 말이 아니라 다르다 라는 말을 쓴다는 것이었다. 각자마다의 역사와 경험과 반응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하나 틀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에게 괜찮다 라는 말을, 나는 남들과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라는 말로 처음으로 해봤다. 그러나 틀리다 라고 생각하던 다른 것에도 쉽게 적용할 순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부정하던 '뒷모습' 은 남들과 달랐을 뿐 틀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가사를 열심히 외우지 못했다. 영상도 렌터박스가 있었다 없었다 제멋대로다. 그러나 한손에는 슬램가사 한손에는 마이크를 든 내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다 틀려도 박수를 받았다. 이 사람들도 차이를 인정하는 것일까? 괜찮다고 하는 것일까? 다리가 후들거린다, 한순간 이 4년에 걸친 이야기는 이제야 끝났고 이제 다음엔 무얼 이야기하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시간이 걸려야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다른 것을 뭘 고민했나 싶었다. 그러나 그 고민은 박수소리와 인삿말에 묻힌다.


Pink haja


생각 중(中) “이 사람들이 모이면 도대체 성에 관해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남녀간의 연애얘기? 섹스에 관해서? 그 정도 이려나 그런데 이상하다. 첫 날에 모두를 999에 오라고 하더니, 무대 위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다. 누군가가 나와 칠판에 Sex/Gender/Sexuality 라는 것을 쓴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다? 자신은 없지만 조금 알고 있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린다. 뻔하게 생각해온 ‘성’이 아니라, 107호 스튜디오 안에서 우리끼리만 말한 ‘성’이 아니라, 이 많은 사람을 두고 하자는 어떤 ‘성’을 말하려는 걸까?”


여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999의자에 앉아 있다가 어딘가로 이동한다. 각자가 선택한 주제에 따라 이야기를 하러 떠나는 것이다. 아무도 이야기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질문하고 대답하다가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다. 가슴이 설렌다, 성에 관한 이야기를 107호에서 우리끼리만 말했었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얘기할까 너무 궁금하다. 과연 내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나에게 성은 아직까지 숨기고 싶고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밖에서 놀기 좋아했던 나는 어쩐지 머리를 기르는 것이 싫었다. 치마도 싫었고 구두는 더욱더 싫었다. 레이스를 입은 순간 죽을 것 같았고 머리띠는 손오공의 머리띠가 조여오면 이렇게 아플까 싶을정도로 아팠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인’ ‘여자애들’과는 달라서 사람들에게 나의 성에 대한 궁금증을 심어줬다. “쟨 여자야 남자야?” “물어봐” “내기할까”. 이런 대화의 의심스러운 사람은 바로 나였다.


한 때는 그게 너무 싫어서, “에라이 나 남자가 될꺼야” 라며 남자같은 말투, 행동, 걸음걸이, 농담, 게임, 놀이를 했었고 남자같은 신체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했었다.

그렇게 남장을 해도 나는 “너 여자같아” 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도대체 여자 남자가 뭔데! 라는 생각마저 들어서 ‘성’은 잘 모르겠어 라고 포기하던 상태였다. 그런 나에게 107호에서 읽은 ‘양성적 어린이 X이야기’는 충격이었고, 누군가 나에게 “중학교 때 치마입으면 호모라고 안했어?” 라는 질문에 “아니 게이라던데” 라고 대답하자 모두 다 웃는 것을 본 것도, 가족 이야기, 동성애자와 양성애자, 연애, 섹스 에 관해서 이야기가 마구 나오는 것을 보며 ‘성이란 참 크구나!’ 라며 더 큰 세계를 본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몰라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도, 이 세상에 없는 나 밖에 아는 이야기였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물어봐야할지 몰랐을 뿐이었다.


핑크하자는 아주 짧게 끝났다. 나에겐 긴 여운을 남기고. 즐겁게 이야기하고 한껏 털어놓고 깔깔깔 거리던 다도방이 눈에 선하다. 우리는 달랐을 뿐 서로 틀리지 않았다. 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와 여자에 관해서 내 성정체성에 관해서 가족에 관해서 연애에 관해서.


이젠 한껏 털어냈다. 나는 괜찮았고, 할 것들은 많았다. 더 이상 내 뒷모습은 내 발목을 잡거나 숨겨야 할 것이 아니었고 내가 앞을 향해가는데 어떤 장애물도 없었다. 그럼 뭘해야할까? 앞을 향해 뛰어야 한다.


달리고 또 달리고 달려


무한도전 


무언의 무거운 분위기가 회의시간 우리 머리 위를 떠나지 않는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걸까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기 전, 나라도 '해야겠다.'


나는 허브였지만, 그 앞에는 '캐치스코프의'가 붙어있었고 그 캐치스코프가 말하는 것이 뭘까 라는 생각보다 '캐치스코프'라고 해서 요구하는 것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캐치스코프는 뭐였을까, '팀에 대한 애정! 그리고 팀원들간의 결속력이 강하다.', '열심히 하는 팀', '실력 있는 팀' 이 아니었을까, 실력 있는 을 나한테까지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아직 1학기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난 뭔가를 해야 했다. 사람들의 기대를 져 버리고 싶지 않았고, 캐치스코프와 같이 하지 않으면서도 잘 하고 싶었다.


모든 일은 나의 일이었다. 맨 처음 회의를 하고 구상한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캐치스코프 밖에서 내가 이렇게 잘 하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워낙 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나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 작업 하나하나, 대사 하나, 분위기 하나, 관객들의 표정까지 나의 작품이고 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만들어낸 것, 모든 좋은 것의 연출자가 되려고 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으면 무조건 뛰어가 내가 처리해야했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꼭 알아야했다. 어린이 ‘짱병’에 걸린 것일까? 내가 없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불안했고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내가 달려가 어떤 일이 있는지 꼭 알고 싶었다. 어디하나 어긋나 있는 것이 싫었다. 계획대로, 완벽하게 되어야만 했다. 다른 팀에 있는 캐치스코프 팀원들이 팀장이 되고, 주도를 하고 영상을 보여주고 그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감동했었다. 나처럼 그렇게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내달려가다 보니, 정작 내가 할 일이 미흡해서 실수를 했다. 치명적인or치명적이지 않은 실수였는데 그럴 때마다 자책하고 그러지 말자면서 나를 다그쳤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하루동안 뛰어다니고 땀을 흘린 까닭에 항상 피곤했었고, 어쩐 걸 앞으로 내달려야 하는데 매일 밤 나에게 했던 말은 아침이 되면 다 잊어버리기 일쑤 였다.


무던하게 넘어가던 다짐이 매일 아침 사라지니, 3일째 일어난 실수는 나에게 꽤 큰 충격을 주었다. 연극과 영상을 보여주며 [달인을  찾아라 : 영중떡볶이 편] 의 떡볶이 아줌마에 대해 이야기 하던 때였다. 팀원은 나, 마니, 나르샤, 밤비였고 나와 마니는 영상과 사운드 편집을 나르샤와 밤비는 영중떡볶이의 분위기를 더 살리기 위해 떡꼬치를 만들고 있었다.

편집을 마치고 세팅을 하던 때였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누군가가 도와달라고 불렀다. 나는 달려가면서 전선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이제 극이 한참 진행될 때 즈음에 영상이 나올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영상은 나오지 않았다. 극을 중단시키고 아무리 빔 프로젝터를 둘러봐도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마지막 대사를 하고 우리의 연극은 끝을 내렸다. 얼굴을 차마 들 수가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걸려 넘어지곤 또 그 조급한 마음에 제대로 세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팀에게 많은 표가 와도, 나를 보고 잘했다, 괜찮다. 라는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실수하고 완벽하지 않은 연극을 보고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열심히 하고 그 모습에 대해 말하는 것이겠지. 그게 전체가 되어서 나한테 말을 하는 거겠지 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래 전주에 할머니 칠순잔치에 가게 되었다. 가족의 중요한 행사였지만 사실상 다음 날 얼굴을 들고 갈 수 없음에 하는 도망이었다. 그런데 전화가 온다. 내가 ‘존경스런 주니어’ 후보에 올라왔다고 한다. 횡설수설하며 소감을 말했다. 머릿속에는 말도 안돼, 내가 뭘 잘했다고, 내가 존경스럽다니 도대체 어딜 보고. 이런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횡설수설 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길찾기들이 X맨이었고, 빔 프로젝터가 나오지 않았던 것은 밤비가 전원을 껐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아마 듣자마자 울컥해서 눈물부터 흘렸었던 것 같다. 두 가지 이유에서 였다. 하나는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구나 였고 또 하나는, 이런 사소한 것도 모르다니. 라는 실망감에서였다.


"뒤를 보면 항상 무서운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도망치다가 내가 지칠줄은 몰랐다."

2008년 봄학기 에세이 : 초속 5cm 중(中)

 

-하기 싫었던 주말영상학교, 오래된 이야기를 할 것이 마땅히 없어서 계속 주변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 왔다.

-English? 아직은 어색해.(Optical english)

-공부는 혼자 하고 나누는 건 같이하고, 그렇지만 내 의견이 있어야 하고

같을 수가 없다. 가르쳐준 선생님들과. 내가 할 수 있는 얘기?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

-우리가 할 수 있는 얘기?(P.V)

-자 이제 시작(?)


무한도전이 끝나고 회고를 하며, 나는 나에게 참 많은 부담감을 쥐어주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 학기의 목표는 ‘잘하자.’라는 것도 있지만, 나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고 열심히 하고 싶었다. 달려가기, 적어도 실수하지 않으면서 나를 자책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랬다.


어쩐지 이상했다. 연애를 해서 그랬는지 기운은 항상 넘쳤고 건강했고 모든 일이 즐거웠다. 학기 초에 나의 프로젝트는 총 10개였다. 정작 그 때는 몰랐지만, 그렇게 많은 프로젝트를 듣겠다고 결정한 것은 일기예보에서 “이번 여름은 대 폭염입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걸어야했다. 뛰려고 앞을 보고 뛰려는 다리를 꽉 붙잡고, 걷자. 걷자. 걷자고 말해야했다. 급한 호흡으로는 아무것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급한 호흡으로 했었던 일들은 다 그르쳤기 때문이고,


방학 중

-허토란, 섞이지 않을 것 같았던 우리가 함께한지 1년이 되었고 이젠 굳이 '함께'이지 않아도 되었다. 무한도전 무성영화 999 쇼하자에서 우리는 같은 공간에 다른 위치로 있었다. 
멋있다.
-꿈꿔오던 일본, 꿈과는 달랐던 일본. 왜냐하면 꿈에는 나는 여행자였고 현실은 참여자였으니깐.

주니어3학기 

-2학기 때 어리버리되면서 1학기인 한결에게 많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번에는 좀 더 같이해보면서 도움되고 여러가지를 함께해보자.
-만화책처럼 시간이 지나면 '후다닥' 완성되어있지 않는다. 꾸준히 해야 완성되는거임
[도쿄슈레방문기]
-미안하지만, 지금에서야 공동작업을 해본 것 같아. 팀장 이어기도 했지만, 아무곳도 숨을 곳 없었고 해야하는 것이 있었고, 먼저 나서야 되는 것도 있어. 덤덤하고 침착하게. 믿음직한 팀장.
우리의 텍스트가 영상안에 들어가있다. 시놉시스를 쓰기가 굉장히 힘들었지만 영상을 보는 내내 영상이 말을 건다. 뭘까,  [save my city]

방학 중
-내 스스로 늘어지지 않은 방학을 만들어보자. 수료 후에 어떻게 살려고 이래
책, 영화, 페미니즘 공부모임 구상. 많은 사람이 하자에 있다. 새로운 사람이 하자에 있다. 나는 지금 준비가 되었어, 그러니깐 '페미니즘 공부모임'을 시작해보자.
-익숙한 집에서 방 밖으로 넘어섰을 때

주니어 4학기
-우리가 어디까지 준비되고 말할 수 있는걸까? 함께 하고 싶은데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각자가 공부하고 모여야 '공부모임' 이 되더라. 나는 공부했나? nono 하지 않았어요.
-혼자를 위해, 나를 위한 영상은 집에서 혼자보고 즐기면 되지 왜 나는 여기서 함께 보고자 했는가. 나는 왜 카메라를 들고있지? 이제 익숙하지 않아서라는 말은 거짓말이야.

[에필로그]
-herb에서 hub로. 중심을 잡고 가고 싶다.
-공부를 한다는 것,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불씨를 가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사람들의 질문: 수료 후에 뭐할꺼야? 대답: 음, 글쎄 근데 영상은 하지 않을꺼야.
이제 그 다음에 올 '왜'에 대해서 대답하겠다.
영상으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글에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결정에 불안감이 사라지자 글쓰기는 어디에서도 한다는 생각을 했다. 가장 필요한 것은 '방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내 질문에 답해가는 게 아닐까.
-이미 안전하고 안정적인 길을 벗어났으면서 계속해서 다시 안정한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만화책처럼 생략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었고 대체로 괴롭지만 즐거울 때도 많았던, 피하고 싶었던 내가 여름을 맞이하기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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