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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1. 먹먹한 시간들에게 부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shift키가 고장나서 ㅆ자음이든, 지우기든 되지 않았을 때 어떤 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쌍자음이 들어가지 않는 글. 그 글은 어떤 글이 될지 몰랐기 때문에, 아주 막연하게 어떤 생각을 하고, 그걸 적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잊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예전에는 그게 어떤 조각들처럼 느껴졌고, 더 막연하게 그 생각들은 언젠가 다시 생각날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나지 않고, 정말 그걸 잊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는 것들이 생겼다. 시간이 지났다. 어떤 것들, 그러나 중요했던 것들은 정말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안 것 같아서 어떤 때는 슬펐다.

2. 차라리 이미 주어진 텍스트를 가지고 써야하는 글보단 이야기 속에서 키워드나 문장을 뽑아내서 쓰는 글이 편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문장들은 그래서 어떤 결과를 얻고자 하는지, 혹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주어졌기 때문에 명확하고 때문에 알 수 없는, 그러니깐 도대체 그걸 가지고 뭘 어쩔거냐 싶은 구석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해서 쓴 이야기들은 내가 썼음에도 마치 내가 쓰지 않은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다. 외로워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반적인 이야기들에서 나는 꽤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고, 거기엔 좋은 친구들과 좋은 부모님이 있기 때문에. 혹은 내가 있었던 곳이 고등학교가 아니라 중학교였고, 대학교에 온 것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방황이나 상대적으로 덜하고, 만족감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이유에서.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것 때문에, 우리는 그 정체를 알아야 한다고 배웠지만, 그 때문에 왜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3. 솔직한 이야기가 오히려 어려워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 그 중에서도 내가 아는 누군가, 의 얼굴이 가끔(이라고 쓰고 거의 매일) 글을 쓸 때 보이는 것만 같다. 지울 수 있는 얼굴이면 좋겠다. 너무나 많은 지우개들이 있었는데, 왜 이건 지우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4. 친구는 그곳이 자기가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장소라고 이야기했다. 적어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이라는 생각이 친구에게 있었고 다른 곳이라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우리는 그곳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 하지만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장소는 내가 도망치는 장소기도 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곳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다른 친구들에게는 해보지 않았던 이야기들도(그렇다면 나중엔 해본다는 이야기가 될까. 어떤 단어의 선정에는 많은 함정이 있다.) 나는 그곳으로 도망친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도망친다. 어떤 날은 그냥 서울나들이가 하고 싶어서 그곳으로 도망치고, 어떤 날은 해장하는데 가장 좋은 커피라면서 그곳으로 도망치고, 어떤 날은 그곳의 어떤 메뉴가 끌린다며 도망친다. 
 그건 마치 보겠다고 받아놓은 파일들을 하나도 열어보지 않는 기분이랑 비슷했다. 점점 가진 건 많아지는데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기분. 쌓아가는 건 메모리인지 부채감인지 모르겠는 것들. 친구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 죄책감이라든지, 어떤 부채감이나 왜 꿈꾸는 것을 당장 현실에서 하지 않는지.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 그러니깐 돈이라든지 장소라든지 하는 현실적인 구애들을, 사실상 많은 제도나 법이나 지원을 통해서 구애받지 않을 수 있는데 왜 하지 않느냐고. 

당장의 현실이 주고 있는, 혹은 그 계획이나 경로들이 주고 있는 안정감이 있을 수 있다. 그건 꽤나 떨쳐내기 어렵다. 나는 진즉이라도 이렇게 가족에게, 부모에게, 그 사람들에게 의지하거나 기대하거나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사람들이 죽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그러니깐 어떤 말도 건낼 수 없고, 그 흔한 짜증도 부릴 수 없는 날들이 마치 내일처럼 선명하다. 청승맞기 그지 없지만, 사람은 참 그렇게 언제, 어떻게 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주 사소한 이유들은 참 많은 일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결정적인 이유라서가 아니라, 이전에 쌓여있던 것들이 하필, 그 때, 맞물리게 되면서 터져버린다. 아주 사소한 계기만 필요할 뿐이다. 이런 것을 우연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믿었구나 싶어진다. 과학은 발달하면서 마치 우리의 내일도 예측할 수 있다고, 너는 언제쯤 죽을 것이니 주어진 시간은 이정도 된다고 운명을 알려주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게 사람같지도 않고, 게임에서 어떤 버그도 허락하지 않는 시뮬레이션 같다. 즉 어떤 이야기보다 가장 허구적인 이야기고, 상상 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이런 질문은 사실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들은 지금에는 그 이유들이 그 사건에 전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다양할 수도 있어서다.
사회학이 재밌는 건, 이런 사고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에서 우리는(이 때의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현상들에 대해서 사후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가장 다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장 제한적인 변수들을 통제하려고 애쓰고, 그 결과를 보다 타당성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마사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현상에 대한 수많은 해석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인간이라는, 어떤 식의 사고방식과 견해를 가진 존재가 그'것'을 조사했으며,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엔 주관적인 요소들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스로의 기억에 대한 해석이든, 어떤 결과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믿고 싶은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어진다. 

가령 이런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일주일 중 헬스장에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은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이며, 7시부터 8시까지는 그 안에 몰린 사람들이 이곳저곳 이동하는 과정에서 충돌하는 현상들이 나타나 더 붐비는 것처럼 보인다. 일주일 중 사람이 가장 많은 날은 월요일이며, 금요일은 가장 적은 사람들이 그 시간대에 헬스장에 온다. 5-6월이 되면 20-30대의 회원들이 급증하는데, 이것은 여름 휴가, 수영복 등 노출이 많아지는 때를 대비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11월에서 1월은 헬스장 내 인원이 가장 적은 때이기도 하지만 10대 후반과 20대 초중반의 회원들의 등록비율은 늘어난다. 첫번째 해석은 수능 끝난 후 수능할인 등으로 수험생들을 끌어당기는 헬스장의 전략 때문이기도 하고, 방학과 대학 지원 결과 발표 전 새롭게 시작하는 때를 준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하나의 해석이다. 모든 헬스장에서 모든 그 시간대의 모든 그 요일에 그럴거라는 보장은 없다. 대체로 그렇다는 것. 대체로 헬스장을 이용하는 연령대는 성인이 많으며, 여성의 경우 연령대가 낮아질 수록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비율이 높다고. 

결국에 이런 이야기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어떤 현상들,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오는 어떤 이라는 말은 결국에는 어떤 것들도라는 의미도 되지만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것들 1-2%의 가능성 같은 것들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날 어떤 개는 쥐약을 먹고 죽었다. 어떤 날 어느 집에선 가족끼리 싸우게 되고 호적에서 한 가정의 이름이 사라지게 됐다. 어떤 날 어떤 사람들은 이별하고, 어떤 날 어떤 사람은 아무라도 좋으니 이야길 들어달라고 울었다. 어떤 날 어떤 사람은 사귀는 사람의 뜻대로 자신의 꿈을 접기도 했고, 어떤 날 어느 집에선 형이 동생을 때리기도 했고, 어떤 날 어떤 집에선 부모가 이혼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카페가 오픈하는 날이었고, 어떤 날은 미납요금을 채 내지 못한 사람의 핸드폰이 정지된 날이었다. 어떤 날 어디에선가 사람이 죽었고, 어떤 그 날엔 사람이 태어나기도 했다. 

예상치도 못한 일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예상했던 일이 완전히 일어나지 않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것에 대한 완전한 해석이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고, 언제나 아마추어처럼 이야기하는 것만 가능할 수도 있다. 다만 조금 더 다양한 방법이나, 근거 있는, 토대있는 바탕을 배경으로 해서 해석하거나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게 아닐까. 왜냐하면 결국에 이야기는 자신의 한계안에서만 가능하고, 할 수 있으니깐. 아는 만큼 말할 수 있고, 자신의 언어가 곧 자신의 한계니깐.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생각들을 하는 것, 어떤 행동을 하는 것,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 자체를 포기할 수 있다. 때때로 많이 포기했고, 포기하지 못한 것을 끌고 가느라 진이 빠지기도 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하던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됐고, 이해하지 못한다며 비웃었던 것들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옹호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했고, 비판을 주고 받기도 했다. 그렇게나 세상에 집착하게 되고, 그 이유들이 전부처럼 생각하게 되는 건 그나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평화라는 건 전쟁이나 자연재해같은 것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상태에서 완전히 변화하게 되고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데도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평화롭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니 마냥 비웃던 사람들은 그들의 한계 내에서 나름의 행복을 생각한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결국엔 그렇게 자기가 옳다는 게, 너에게도 나에게도 옳다는 이유로 그렇게 행했음을 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나마 부모라는 사람들도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고,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할 수도 있는 것도 같다. 


나이가 들었다.
는 말을 참 길게도 끌어서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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