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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4월 20일, 부활절. 일요일

"자기가 쓴 글을 읽을 때는 항상 일종의 죄스러운 열정으로 읽게 된다. 내 일기의 문제는 난폭하며 제멋대로인 데다 빈번히 비문법적이며,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단어들이 눈에 띄어 읽기가 좀 괴롭다. 앞으로 이 일기를 읽을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이것보다는 훨씬 더 잘 쓸 수 있다는 것을 말해 두고자 한다. 이 일기에 더 이상 시간을 소비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 일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조금은 칭찬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일기에는 거친 구석과 박력이 있으며, 때로는 뜻하지 않게 어떤 문제의 급소를 찌를 때가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처럼 나만을 위해 글을 쓰는 습관은 글쓰기의 좋은 훈련이 된다는 신념이 나에게는 있다는 사실이다. 글쓰기는 근육을 이완시켜 준다. 잘못을 저지르거나 실수를 한다고 해도 신경 쓸 것은 없다. 이처럼 글을 빨리 쓰고 있으니 대상을 향해 직접적으로 순식간에 돌진하게 된다. 그러니 닥치는 대로 단어를 찾고 골라서, 펜에 잉크를 묻히느라 쉬는 시간 말고는 간단없이 그 단어들을 내던져야 한다. 지난 1년 동안 직업적인 글을 쓰는 일이 좀 편해진 것 같은데, 이것은 차마시고 난 뒤에 스스럼없이 보낸 반 시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일기라는 것이 도달할지도 모를 희미한 형태의 그림자 같은 것이 내 앞에 떠오른다. 그러다 보면 따로따로 떠다니는 인생의 부유물 같은 소재들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알게 될지 모르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일기를 의식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소설 속에 사용하는 것 말고도 다른 용도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일기가 어떤 모양이기를 바라는가? 짜임새는 좀 느슨하지만 지저분하지는 않고, 머릿속에 떠올라오는 어떤 장엄한 것이나, 사소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라도 다 감쌀 만큼 탄력성이 있는 어떤 것. 고색창연한 깊숙한 책상이나 넉넉한 가방 같은 것이어서, 그 안에 허섭스레기 같은 것들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도 던져 넣을 수 있는 그런 것이기를 바란다. 한두 해 지난 뒤 돌아와 보았을 때, 그 안에 있던 것들이 저절로 정돈이 되고, 세련되고, 융합이 되어 주형으로 녹아 있는 것을 보고 싶다. 정말 신비스럽게도 이런 저장물들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 같은 주형이 우리 인생에 빛을 반사할 만큼 투명하면서도, 예술 작품의 초월성이 갖는 침착하고 조용한 화합물이기를 바란다. 오래된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검열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거나 쓰는 것이다. 내가 별생각 없이 써 놓았던 것 중, 쓸 당시에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곳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묘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만함은 곧 지저분함이 된다.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기록해야 할 때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펜이 길잡이 없이 멋대로 제 갈길을 가게 해서는 안된다."


어느 작가의 일기, 버지니아 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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