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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옛날 이야기


목욕을 하고 나면 한껏 나른해지기도 하고, 일련의 것들이 다 끝나버린 기분이라서 굉장히 나른하지만 또 기분이 좋다. 왜인지 돌아보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목욕은 하지 않았지만, 운동이 끝나고 하는 샤워는 비슷한 느낌이다. 나는 지금 무언가 끝났다는 기분이 드는데 이게 불쾌하거나 불안하지 않고 눈을 무겁게 누를 만한 피로가 서서히 오는 것도 같고 기분 좋은 나른함이다. 

5일동안 앓던 치통이 확실히 줄어들었고, 좋은 문장들 그러니깐 보고 감동하고, 턱 하고 치는 문장들을 보게 되었고, 정말 멋있는 걸 넘어서 그 당당함에, 침착함에 마음에 쑥 하고 박혀들어온 사람의 말을 들었다. 공부를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길 바랬던건 내가 동경하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도 그 중 하나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였다. 이 경험들을, 그러면서 느낀 것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고 공감받고 싶었다. 어즈간히 외로웠나보다. 외로워하고 있나보다. 왜냐하면 그 공백같은게 애초에 채워지지 않은채로 있었으면 그 빈 공간조차 공간으로 인식해서 익숙해졌을텐데 그게 아니라 한번 어떤 말로 설명하기에 벅찬 순간들이 빛처럼 터져 채워지는 순간들이 있었고, 그 순간에 대한 앓이가 지금까지 생각하게 하는 것 같다. 


노동자대회에 가서 내가 느낀 걸 이제와서 표현할 수 있다면, 절망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거기서 왜 절망감을 느꼈는지는 모르겠고, 이걸 누구한테 이야기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 때를 생각하면 딱 한장면이 떠오른다. 무대엔 불이 환하게 밝혀져있고,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며 무대와 나까지 거리에는 여러 개의 깃발들과 앉아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의 머리가 있었다. 한쪽에서는 향냄새가 올라왔고 저 멀리서는 담배냄새가 넘실거리고 있었으며, 서울역 근처의 찌린내가 나기도 했다. 같이 간 사람들의 앳된 얼굴들이 솜털같아서 멀미가 났다. 

허겁지겁 그 자리에서 떠나고 만난 사람은 학회에 다녀와 한껏 정갈한 모습이었고, 난 밖에서 전대회 후드집업에 목도리에 패딩까지 걸치고 목도리를 돌돌 싸매고 있었다. 한명은 술에 취해, 한명은 감상에 취해. 그러고 마신 술에 다른 때보다 금방 취하게 되었던 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제대로 된 활동이나 방향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저 방법으로는 안된다! 라고 생각하면서, [일반 대중]에겐 좀 더 좋은 방법이라며 이것저것 떠들곤 했지만, 사실 그건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나온 나한테 하는 변명이었다. 난, 다른 방법을 봤어. 이것도 필요하지만, 이것만은 아니야. 라고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고 말이다. 

총학생회 사무실에 붙이기로 했던, 나는 동성애자의 친구입니다. 스티커는 그날 잊어먹었다. 
활동하지 않게 되었고, 만나지 않게 되었고, 나가지 않게 되었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안간힘을 부렸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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