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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예의차리기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애도하는 시간을 갖자. 라고 많이 생각한다. 그 말이 떠오르기도 하고, 스스로를 보는 과정이 마치 그 과정인 것 같다고 여기기도 하다. 몇 해전, 아니 수년 전 이별한 친구였는지, 이별한 나였는지. 나에게 친구가 건내준 책의 제목이기도 했다. 생각했던 것은 연애라든지, 관계라든지, 우리는 이별에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할 정도로 제목에 대한 임팩트가 컸고, 와. 그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한, 정말 번개가 번쩍 내려친 것처럼(숨겨왔던 나의~), 그런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 말을 상투적으로, 추상적으로만 느꼈었다. 가령, 헤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누구를 만난다니. 와 같은 상황에서 이건 예의가 없는 상황인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새로 누군가를 만나고 싶습니다. 소개팅을 해주세요! 라고 말하는 상상을 한다. 그리곤 그 상상에 대해서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지금 있는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어쩔 줄 모르겠습니까? 아니면 감정적인 부분에서, 의지하는 부분에서 허기가 느껴지기 때문입니까?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것은 드라마니 영화니 어쩌구니 하는데서 말하는 것처럼, 이미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다음, 그럼 왜 그러시는 것 같습니까? 쉴새 없이 떠들고 싶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이런 것들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구 때문입니까. 생각이 나기 때문입니까? 마지막의 경우라면, 그럼 잠시 슬픈 것으로 하자. 라고 이야기해버린다든지. 앞의 이유들이라면 트위터에서 마구마구 써버리면 그만인 것이었다.


사실은, 스스로가 조금 더 지겨워져서 진물이 날 것 같았었다. 어떤 행동과 통제하지 못하거나, 주저하지 않는다든지, 조절하지 못하는 것들이 지겨워져서, 느끼는 것이 지겨워져서 오늘도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생각이나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생각이 들고 이런 감정이 드는 스스로와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돼버렸다. 가족이야 한동안 앓고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분리할 시간을 두면 되는 것인데, 어떤 관계들은 끝내면 끝나는 관계인데, 스스로와의 관계는 단절될 수 없고 평생을 견디거나 견뎌내야 하는 것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나일수있는세상 이런 맥락과는 다르게, 어쨌거나 저쨌거나 뭐 좋은 변화가 생겨서 좋은 일들이 생기고, 지금보다 조금 더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지만 그 달라지는 시간들을, 예를 들어 스포츠만화에서 한 가지 스킬을 능숙하게 다루는 주인공이 훈련하는 수많은 시간들을 스킵하는 몇 칸의 배치와 같은 시간들 없이, 나는 지내고 지내고 지내어야 하는 것이라는 걸, 아주 최근에야, 말로 할 수 있게 알았다.


한동안 앓았던 것처럼, 깨어나니 멍한 길고 기억에 남는 꿈처럼, 그 시간들이 흩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시간을 지내고, 경험했으며 그것이 어떤 시기가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인 것 같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이건 한편의 논문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어떤 가설과 가정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시도를 하고, 그러다 나온 결론은 처음 생각한 것과 같지 않았지만, 현재의 시각과 논점에서는 이 논문은 마무리가 되는 것. 그렇지만 한 연구자의 생애에서-가령 박사에게 학부 때 논문을 읽어주면 그건 괴로운 일이겠지만, 괴로운 까닭은 그때의 부족함과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노력했기 때문이겠다만-수 많은 논문을 써내려가고, 이전 논문보다 발전된(발전 혹은 진전, 이전과 다른 차이를 가진 그러나 같은 맥락을 공유하는, 발전이라는 말이 적합하게 들어맞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것을 쓰기 위하여 노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연애도 한 사람의 생애에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동일한 사건, 다른 시간과 다른 관점, 동일한 사람(그러나 차이를 가지게 되는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졌다.


누군가를 만나고, 반성하는 밤도 있었으며, 시간을 되돌려서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던 스스로가 싫어져서, 진물이 나기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니. 이런 것과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을. 거창하게,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를 견뎌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 나는 나와 이보다 수많은 밤을 지새울 것이다. 지겨운 부분이 분명하게 있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도 하고, 어떤 것은 너무 싫어서 지우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끌어안는다. 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고 싶은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끌어안겨짐을 당하는, 누군가를 안고 안기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스스로에게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떠오르는 감정도, 생각도, 심상도 잘 지나갈 수 있게, 괴롭지 않게 누르지 않고 참아내지 않고, 뱉어내게 도와야 하며, 단단하게 쌓이고 무거운 것이 희미해지고 얇아지도록, 시간을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슬프면 슬퍼하고, 힘들면 힘들어 하고, 뭐가 하고 싶어지면 하게 하고. 충동적으로 걷기도 하고, 걷다가 이게 뭔가 싶어서 웃기기도 하는 시간들을, 그러려니. 하고 보내기도 하는 게, 기다 아니다를 떠나서 그대로 둬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감정의 정도를 떠나서, 그것이 어떤 것이었든 중요하기 때문에 해왔던 선택들이었고, 그 선택을 따랐으며 그 결과 또한 기꺼웠다. 그러니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일어나더라도, 그 상황에 집중하였으며 그 과정이 어떤 결과가 되었더라도 내게 소중했으며, 그 시간들을 겪었고 경험하는 과정에 지금 이 순간도 있는 것 같다. 가령 좋았으니깐, 그렇게 시간을 보냈고, 힘들고 속이 상하거나 화가 나고 슬프기도 했었다. 중요하다는 것이 모든 선택에 대하여 까방권처럼, 이랬으니 어쩔 수 없음! 과 같은 기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애도하고 이별의 예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때의 선택과 그때 흐르는 시간들을 흘러가지 않고 지나가게 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해왔던 것들을 존중하자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고, 그때 그랬었지 말았으면. 하는 말들은 지난 시간들에 내가 보내고, 중히 생각했던 것들을 지나치게 작게 만들고, 의미없고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고 싶지 않아지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지 않고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필요한 시간이었고, 중요한 선택이었고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와 다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더라도, 적어도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을 배우고, 실수할까봐 겁이 난다. 긴장이 되고, 잘 말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말하는 것이 잘 말하는 것인지, 이 방법이 초래하게 될 결과를 알지 못하니 실수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물어볼 수 있으면 이 때의 좋은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야 하고, 실수를 한다면 결과에 책임을 지고 다음에는 다른 선택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게 이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부정하지 않고. 아 그랬구나. 중요하고 소중한 시간이었구나. 이 점은 아쉬웠고, 이런 시간들이 힘들게 느껴졌었구나. 일종의 애도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재현되거나 재연되지 않을 시간은 내내 남을 것이고, 때때로 생각 나기도 할 것이다. 그때마다 지나치게 힘들지 않기 위해서는, 힘들다고 느껴질 때 힘들어하는 것이고, 슬플 때 슬퍼하고 화날 때 화내하고, 감정들이 응어리를 남기지 않고 여운이 될 수 있게, 이 시간이 흐르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게. 그래서 글을 써본다거나, 더 걸어본다거나, 다른 것들을 해본다거나, 새로 사람을 만나본다거나 등등 지겹고도 긴요한 시간을 조금 더 둬보기도 하고, 다른 변주를 줘보면서 보내는 것이, 어쩌면 그 사람이 말한 필요한 것과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내가 이야기 하는 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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