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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갑자기


1.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부터 엄마는 전주로 나를 혼자 보냈다. 엄밀히 말하면 시작은 혼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버스를 타는 곳까지는 데려다 줬으니 말이다. 버스를 타고 이송되는 기분이었다. 무심하게 지나가는 특히나의 겨울의 풍경들이 있었다. 몇 번의 비슷한 모습으로 자리한 모습들 말이다. 초등학교 아이가 버스에 혼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 모습은 어떤 풍경이 되었을까. 그것도 로봇 로고가 박힌 신발을 신고 여자색이라며 파란색만 고집한 소녀의 표정을 하고 있는 아이가 창밖을 보고 있는 풍경이라면. 

과분하게, 라는 말처럼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다양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기사 아저씨는 어린데 고생한다며 요쿠르트를 건내주었고, 다른 좌석에 앉은 아주머니는 호빵을 건내주고 한번쯤은 내 머리를 쓰담고 갔다. 내릴 때 가방까지 내려줬으니. 그런 버스가 있었다. 우등버스도 아니었고, 어쩌다 달린 라디오 잭이 신기해서 쳐다보는 버스가. 전주고속버스에 대한 기억이다. 그 때의 기억들 중 아련하게 따듯하지 않은 기억들이 어디있을까.


2. 화면과 구도를 떠나서 겨울은 아련하다. 누군가 쉽게 떠나가는 계절이기도 했고, 누군가와 만나는 계절이기도 했고, 싸우기도 했으며 울기도 했고 아파해야 하나 라고 생각하기도 했던 계절이기 때문이다. 매번 이 계절이 오면 멍해진다. 더 실수하고 더 생각하고 자책한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어쩌면 아직도 나를 잘 안아주지 못하는지도. 

3. 사실 따듯하다는 감각보다는, 춥지 않네 라는 생각이고 좋다 보다는 나쁘지 않네 라는 생각이 더 크다. 감정이나 감각을 왜곡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잘 모르기 때문에 혹은 이 감정이 내가 들어왔던 그게 맞는지 싶기 때문에. 


5. 갑자기 있잖아, 나는 너를 참 많이 좋아'했었다'라는 생각을 했어. 3박4일을 거짓말하고 밖에서 보내기도 처음이고, 그거 알아? 난 정말 외박이 싫어.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자는 것도 안 좋아하고, 다른 집에서 일 보고 씻고 옷 갈아입고, 눕고 그러기가 싫어. 내가 알 수 없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는게 제일 싫어 그래서 외박이 싫어 나는, 상대를 생각하면서 뭔가를 주고 싶다는 생각, 내가 이런게 필요한걸까? 라는 되새김질 같은게 처음이었어. 아니 엄밀히는 처음은 아니지만 그 상대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게 처음이었고 수많은 말과 과정들을 거쳐서 누군가 좋아한다거나 소중하다고 생각되면 내 친구들이 나한테 해줬던 것처럼 나도 줄 수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고 만난 사람이 처음이었지. 그래서 연소가 된 것 같다. 이제 남은건 도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지 그 이상은 아닌 것 같아.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라고 쓰게 된다면 정리가 되려나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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